오키나와에서 비행기를 타고 더 남서쪽으로 내려가면 남국(南國) 중의 남국인 이시가키 섬이 있다. 본 섬과 크게 다르지 않겠지 싶었는데 도착하고 나니 고작 한 시간 남짓한 비행시간에도 불구하고 보다 야생의 느낌이 물씬 나는 풍경이 있었다. 고흐의 그림에 나올 것만 같이 구불구불한 가로수들이 흐린 날씨와 함께 기이한 풍경을 자아내며 ‘여기가 남국이노라’하고 말해주었다.
짧은 이시가키 여행의 숙소로 우리가 택한 곳은 게스트하우스 안시(AnnSea)였다. 3일의 짧은 휴가 동안 알차게 다이빙도 다니고 들어갔다 오고 경치 좋은 곳도 가보았지만, 왠지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이기도 하다. 한적한 정원을 가진 이 곳은 바다색 가득한 이 섬에서 조용한 녹색 휴양처처럼 보였다. 호텔보다 너른 방에 마당, 무엇보다 객실 데크가 딸려있다는 연유로 다른 호텔을 제치고 내 마음에 쏙 들어왔고, 단 두 채의 방만을 운영하는 방식에서도 주인분의 여유로움이 묻어나는 것 같았다. 그럴싸한 이유를 늘어두었지만 사실 결정적으로 우리 마음을 움직이는 역할을 한 것은 유명한 이시가키 규(石垣牛, 이시가키 섬의 소고기) BBQ를 제공한다는 점이었을는지도 모른다.
유쾌한 주인아저씨는 도쿄 출신으로 다이빙 샵을 운영하다 이시가키로 왔다고 했다(우리 집 앞 이자카야 사장님도 같이 도쿄 다이버 출신이다. 여담으로, 일본 대지진 이후 안전에 대한 걱정으로 오키나와로의 이주가 늘었다고 했다. 대외적으로는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지만). 초보 다이버인 우리는 서글서글한 웃음을 가진 아저씨와 이야기하는 것이 즐거웠다. 도쿄의 삶을 정리하고 부인과 함께 시골 중에 시골로 내려와 사는 모습이, 언젠가 다시 오키나와로 돌아와 중년 또는 노년의 삶을 사는 우리의 모습을 그리게 해 주었다.
차를 달리다 도로 한 중간에 꽤 큰 새가 있어서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혹시나 얀바루 쿠이나(오키나와 본섬 북부에 서식하는 희귀한 보호종인 새)인가 싶었는데,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보니 더욱 예상하지 못한 존재였다. 바로 공작새였던 것이다. 제법 긴 꼬리까지 화려한 공작을 이시가키섬에서, 그리고 철장 안이 아닌 도로 위에서 볼 줄은 기대하지 못했다. 공작새는 벙 쪄서 멈춰 서있는 우리에게 시선을 한 번 던지고는 도도하게 한 걸음씩 옮겨 길을 내어주었다. 게스트하우스에 돌아와 아저씨와 얘기를 하다가 이 이야기를 했더니 공작이 이시가키에 들어온 사연을 들려주었다. 1970년도에 이시가키에서 멀지 않은 코하마 섬(小浜島)의 한 호텔에서 관광용으로 공작을 들였다고 한다. 호텔 경영이 어려워 폐업하며 근처의 학교에 공작을 기증했는데, 태풍으로 사육장이 무너지며 탈출한 공작이 야에야마 제도(오키나와와 대만 사이에 있는 군도로 이시가키, 다케토미, 코하마 등 섬을 포함한다)에 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외래종이 토종 생태계를 위협한다는 안타까운 이야기였지만, 사육장이 태풍에 무너졌다는 오키나와다운 일화와, 도로 위에서의 낯선 조우가 싫지만은 않았기에 조금은 웃음이 나왔다.
이 무렵 이시가키에는 반딧불이 투어가 많았는데, 유명한 공원은 일정상 거리가 멀어서 게스트하우스에 있는 1000엔짜리 호타루(반딧불이) 투어를 대신 신청했다. 해가 지고 나자마자 이른 저녁 30분 정도의 시간 동안만 반딧불이를 볼 수 있다고 해서 아저씨의 차를 타고 늦지 않게 뒷산으로 갔다. 작은 불빛이나 소음에도 반딧불이가 예민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차를 적당한 곳에 세워두고 핸드폰도 없이 걸어가 본다. 작은 소리로 ‘저기 저기’하는 아저씨의 손 끝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반짝, ‘아 찾았다!’ 싶을 때쯤 그 옆에서 또 반짝. 그렇게 한 마리씩 찾으면서 신기해하고 있는데, 이윽고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샌가 좁은 찻길 양 옆으로 반짝이는 불빛이 가득 번진다. 만화 속에서나 무리로 빛나는 반딧불이를 보았는데 정말 그것과 같이 어스름한 숲 길가로 불빛이 찬란했다. 몽환적인 풍경에 취해 조용히 감상하니 잠시 후부터는 불빛들이 찻길을 건너 서로 왕래한다. 반딧불이가 이렇게 반짝이는 것은 짝을 찾기 위한 것이라고 하는데, 내심 다들 짝을 잘 찾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둑한 산속 반짝임 사이에 우리 셋만 있으니, 마치 우리가 비밀의 문을 열고 동화 속에 들어와 버린 건 아닐까 싶다. 이런 풍경을 묘사할 자신도 없었지만, 잘 묘사를 한들 이 풍경을 못 본 사람에게 이를 믿게 하긴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을 남길 수도 없어서 아직까지 그 광경이 나에게조차 꿈결 같으니 말이다.
반딧불이들이 잦아들고 아까보다 확연히 어두워진 길을 더듬어 차로 가는 길, 고개를 들어 쏟아질 듯한 별빛을 마주했다. 5월이니 날이 맑았으면 은하수까지 볼 수 있다는데, 조금 흐린 날이라 은하수는 못 봤지만 흐린 날씨에도 불구하고 이런 하늘을 만날 수 있다니 감탄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오키나와에서 이렇게 넋을 놓고 별을 볼 때면, 이렇게 별이 많은 걸 모르고 죽었다면 너무 억울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숙소로 오가는 차 안에서 아저씨가 들려주는 이시가키 동물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특이하게 우는 King bird, 매, 부엉이, 개구리 소리를 애정을 담아 하나씩 따라 불러주시는 덕에, 그저 숲 속 소리로 뭉뚱그려 지나칠 수 있던 소리 하나하나에 음과 이름을 붙일 수 있었다.
이렇게 별이 많은 걸 모르고 죽었다면, 너무 억울했을지도 모른다.
일본 여행을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여기는 모든 것에 세금이 따로 붙는다. 당시 8%였던 소비세는 편의점에서 100엔짜리 음료 하나 사더라도 달갑지 않게 1엔짜리가 생기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이 작은 게스트하우스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도 세금을 피해가지는 못 했다. 위의 호타루 투어도 퇴실할 때 보니 세금을 붙여 1080엔이 되어있었다. 당황스럽지는 않았지만, 우리에겐 지금까지도 웃음을 주는 일화가 되었다. 아저씨와 셋이 작은 차에서 정겹게 새소리를 흉내 내며 했던 투어에까지 세금이 붙을 거라곤 생각 못 했기 때문이다. 옛 우스갯소리 중에 욕쟁이 할머니 식당에서 주인 할머니에게 욕을 들으면서도 정겹다고 생각하며 식사를 했는데, 계산하려고 보니 지갑을 두고 와서 “외상으로 좀 해주세요 할머니~”했더니 주인 할머니가 정색하며 “왜 이러세요 손님”했다는 이야기가 생각난달까. 아무튼, 혹여 일본 여행 중 예기치 않은 곳에서 세금을 만나더라도 너무 놀라지 말라 이야기해주고 싶다.
어딘지 허당끼 있는 도쿄 다이버 출신의 아저씨의 웃음과 King bird를 똑같이 흉내 내는 소리가 아직도 기억난다. 이때의 경험을 계기로 우리 부부는 훗날 다시 오키나와에 돌아가 작은 호텔을 하고 싶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이왕이면 부업으로 방을 두 채 정도만 꾸리고 사람들에게 오키나와 구석구석을 소개할 수 있다면 재밌지 않을까. 이따금 우리끼리 미래에 꾸릴 호텔의 모양과 배치를 얘기하는 것만으로도 꿈에 가까워지는 기분이 든다. 오키나와를 그리는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