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 서퍼의 바다 생존기
잠시 다녀온 하와이에서 서핑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하와이의 파도는 크고 길어서 서핑을 하기에 최적의 조건이었고, 선생님이 살짝만 서핑보드를 밀어주면 초보인 우리도 일어서서 파도를 타는 짜릿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오키나와에 돌아와서 우리는 중고로 저렴한 서핑보드를 장만했다. 우리 부부의 몸은 멋진 서퍼들의 그것과는 달라서인지 짧았던 레슨만으로는 혼자 파도를 잡기는 쉽지 않았다. 실력은 마음처럼 늘지 않았지만 패들링을 하며 파도를 거슬러 나갈 때만큼은 거센 자연을 벗 삼아 즐기는 바닷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사건이 있던 날도 풍향, 파고, 밀물 때를 알아본 뒤 서핑에 좋은 날씨에 맞춰 바다로 나갔다 [1].
[1] 서핑을 위한 오키나와 바다 상황을 볼 수 있는 사이트: https://magicseaweed.com/Okinawa-Prefecture-Surfing/197/
평소에는 잔잔한 바다라 해수욕을 위해서 자주 가던 동네 해변인데, 역시 서핑에 좋은 날을 잘 고른 건지 오늘은 서퍼들도 몇몇 보였다. 서핑보드 위에서 패들링을 하며 나아가기도, 오리발을 끼고 바디보드에 몸을 맡긴 채 파도를 타기도 했다. 조금 놀다 보니 몸도 풀린 것 같고 이제 파도를 잘 잡을 준비가 된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으레 서퍼들이 그렇듯, 우리도 먼바다를 바라보며 보드에 앉아 좋은 파도를 기다렸다. 파도를 잡거나 놓치기를 몇 번. 그러다 해안을 바라보니 우리가 처음보다 꽤나 바닷가에서 멀어져 있었다.
“오빠, 여기서 파도 기다리지 말고 좀 돌아가서 하자. 너무 멀리 나온 것 같아.”
식의 오케이 사인을 받고, 나는 오리발을 차고 바디보드 밀며 조금씩 육지 쪽으로 갔지만, 속도가 평소 같지 않았다. 뒤돌아 보면 식 역시 서핑보드 위에서 패들링을 하고는 있었지만 우리 둘의 사이는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았다. 오리발로 물을 밀어내고 모래사장과의 거리를 재고, 다시 뒤돌아 남편과 나의 거리를 가늠해본다. 그러기를 몇 번 하고 나서야 '에이 설마'라는 생각을 뚫고 우리가 처한 상황이 확 와닿았다.
'우리, 조난당할 수도 있겠구나'
그렇다. 우리가 해변 쪽으로 헤엄치고는 있었지만, 몸은 그와 달리 조류에 의해 조금씩 항구 쪽으로 떠밀려 가고 있던 것이다. 내 머릿속에서는 우리가 봤던 수많은 해양 다큐멘터리들이 재생되며 조류, 이안류와 같은 무시무시한 단어들이 지나갔다.
'침착하자.'
우리는 패닉하는 대신에, 조금 더 가까운 해변과 항구 사이의 방파제 쪽으로 헤엄쳐 가기로 목표를 바꾸었다. 무거워진 발장구를 치며 바라본 바다는 여전히 아름다웠고, 너무나 익숙한 우리 동네가 손에 닿을 듯이 펼쳐져있었다.
‘아아, 우리가 그토록 사랑하는 바다에서, 이렇게 가는 건가?’
겉으로 침착한 척했지만, 내 머릿속은 이런 상황에서 종종 너무 빠르게 돌아가는 경향이 있다. 돌이켜보면 파도가 거친 날은 아니었고 부력이 있는 웻 슈트와 서핑보드까지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정말 생명이 위험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처음 느끼는 조류에 나는 겁을 잔뜩 먹은 상태였다. 일단 조류에 휘말릴 경우 헤엄으로 너무 힘을 빼면 안 된다는 교육 내용이 생각나 발차기에서 힘을 살짝 뺐다. 그리고는 해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S.O.S를 보내기로 마음먹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살려주세요!”
Help me 대신에 살려주세요라니! 순간적으로 영어는 통하지 않을 것 같았고, 일본어로는 감조차 잡을 수 없었으니, 급한 대로 튀어나온 말은 '살려주세요'였다. 미디어에서나 봐서 사뭇 식상한 이 말을 내 입으로 직접 내뱉는 날이 올 줄이야. 내 손짓을 본 누군가가 우리의 상황을 알아챘을까? 혹시 '안녕하세요~' 정도의 즐거운 손짓으로 보면 어쩌나 싶었다. 다행히 본능적으로 나온 절박한 손짓은 언어의 장벽보다 강력했고, 마침 가까이 서핑을 나온 부자(父子)가 우리를 발견했다. 그 두 명의 서퍼가 우리를 도우러 왔고 나는 열한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소년의 서핑보드 뒤에 내 보드를 묶인 채 끌려서 해안으로 다다를 수 있었다. 조카뻘의 어린 소년의 뒤에 끌려왔다는 부끄러움은 들지도 않았다. 그저 그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진짜 서퍼'의 아우라가 대단해 보였다. 내가 구조되는 동안 남편은 방파제를 밟고 땅 위로 올라왔다. 부자에게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나서 뒤돌아보니 해안으로 걸어오는 남편이 보였고 그제야 안도의 웃음이 났다.
둘이 손을 잡고 같이 터덜터덜 백사장으로 걸어와서 보니, 왠 경찰차가 도착해있었다. 알고보니 해변을 산책하던 한 부부가 내 S.O.S 신호를 보고 경찰에 신고한 것이었다. 오, 친절한 오키나와 사람들! 덕분에 우리는 젖은 몸으로 경찰차 옆에 얌전히 서서 신분증을 제시하고 사건 경위에 대한 인터뷰를 해야 했다.
“아, 저희가 서핑 초보라서요. 죄송합니다.”
다소 민망한 이야기를 입 밖으로 내다보니 조금 전에 생사를 오가던 긴박감은 없어졌고, 머리를 긁으며 멋쩍은 웃음이 나왔다. 경찰은 우리의 신상을 적어가며, 다음번엔 조심하란 교훈도 잊지 않았다. 아, 오키나와 경찰서에 우리의 흔적을 남길 계획은 전혀 없었는데 말이다.
그 뒤로 우리끼리 또 서핑을 갔었나? 글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몇 달간의 오키나와 바다 생활에 제법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던 우리를 겸손하게 해 준 날이었다. 남들에게 차마 얘기한 적 없던, 조금은 부끄러운 에피소드를 여기에 풀어놓지만, 여전히 바다를 사랑하는 우리는 언젠가는 진짜 바닷사람이 되는 날을 꿈 꿔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