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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 갱 Oct 23. 2021

집을 비우다

다시 여행자로 돌아가다

 귀국 준비를 하며 하나씩 짐을 한국에 보내기 시작했다. 너무 많은 짐을 보내지 않도록 대부분의 물건은 학교나 한인 카페에 올려 팔거나 나눠주었다. 심사숙고를 해서 짐을 정리하고 나니 꼭 다섯 박스가 나온다. 가장 저렴한 대신 최대 3개월까지 걸릴 수 있다는 선박으로 짐을 보내고 나니, 캐리어에 담아 갈 수 있을 정도의 최소한의 물건만 남게 되었다. 늦지 않게 부지런히 짐을 정리해야 한다며 내놓은 가구들이 생각보다 너무 빨리 팔려서, 우리는 남은 한 주를 박스에 천을 뒤집어 씌워 식탁을 삼고, 담요를 바닥에 깔고 자야 했다. 그래도 와인병에 나뭇가지를 꽂아 전구를 두르고, 아끼는 달 모양 조명을 켜 둔 방 안은 끝까지 우리만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마지막 요리로 파스타를 만들어 박스, 아니 식탁에 올리고 와인까지 곁들이며 주위를 둘러본 뒤 서로에게 말했다. 


지금 이렇게 있으니, 우리 가진 것 없지만 제법 낭만을 아는 사람들 같지 않아?
박스에 천을 둘러 식탁으로 쓰지만 낭만을 즐길 줄 아는 부부의 식탁

 여유 있게 귀국 일주일 전 우리 집을 학교에 반납했다. 집을 점검하러 학교에서 사람이 나왔고, 집 안을 여기저기 둘러보았다. 빌린 집을 반납할 때 작은 흠이라도 발견되면 적지 않은 돈을 물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탓에 우리는 전 날까지 얼룩을 찾아 지우기에 바빴다. 직원이 꼼꼼히 하나씩 확인하는 동안 긴장되는 마음으로 기다리다 들은 말은,


너네 집 정말 좋다!


 직원분은 자기는 동쪽에 있는 우루마 시()에 사는데, 이 동네가 조용하고 경치가 좋다며 우리 집을 칭찬했다. "역시 그렇지, 우리 집 너무 좋지?" 이제 곧 떠나야 하는 집 칭찬을 들으니 뿌듯함이 드는 한 편, 그 좋은 곳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서운함이 몰려왔다. 그러고 보니 몇 주 전 짐을 싸면서부터 맘이 벅차올라 눈물이 나기도 했는데, 막상 떠나는 날이 가까워오니 해야 할 일들이 많아서 울 새가 없었다. 슬픔에 빠지는 대신, 우리는 손을 잡고 집 안 곳곳을 둘러보며 고마웠던 집과의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정겨운 뿡뿡이까지 학교 친구에게 넘겨주고 나니, 우리는 금세 렌터카에 짐을 실은 한국 여행객이 되었다. 1월 말 우리가 마지막 여행지로 떠난 곳은 북부의 나키진 성터에서 열리는 벚꽃축제였다. 오키나와의 벚꽃은 칸히자쿠라라는 종으로 우리나라나 일본 본토의 벚꽃과는 다른 품종이라고 한다. 일정한 추위가 있어야 꽃이 피기 때문에 보통의 꽃과 달리 북쪽부터 피기 시작하여 남쪽으로 내려오는 것이 특징이다. 오키나와의 강렬한 햇살을 닮은 것인지 진한 꽃분홍색의 벚꽃은 하늘거리는 벚꽃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아직은 겨울이지만 바알갛게 오른 꽃을 보니 곧 봄이 오는 것만 같다.


 1년 전 봄에 남편 손을 잡고 오키나와에 왔는데, 봄을 부르는 벚꽃을 보고 나서야 여기를 떠나기로 한다. 둘이 마주할 새로운 일상에도 즐거운 일이 많이 있겠지. 함께 걷다 보면 언젠가 한 번쯤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손을 꼭 잡고 조금은 의식적으로 더 씩씩하게 걸어본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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