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봉우리를 보면 가슴뛰는 두 초로의 남자의 명절 휴일 보내기
명절의 긴 연휴 끝에 군 동기놈한테 연락이 왔다. 전에 얘기했던 행군길 따라가기를 오늘 해 보자고.
원래 내일이었는데, 사업하는 사람이다보니 내일 출근해야 한다고 해서 시간많은 내가 양보해서, 지금은 사라진 부대 앞으로 먼저 갔다. 그곳은 고려 말 지어진 유서깊은 회암사라는 절이 있었던 곳이다. 내가 군 복무 당시에는 그냥 잡초로 뒤덮인 벌판이었는데, 95년부터 십 년 넘게 발굴을 해서 지금은 전시관도 있고, 많은 부분 부도탑과 석주 등을 복원해 놓았다. 우리가 내는 세금의 효용을 뿌듯하게 느끼며 들어가보니,
당시에는 동양 최대 규모의 사찰이었고, 태조 이성계가 찾아와서 염불을 드리고 갔을 정도라고 하니, 그 위용이 신라시대 경주 황룡사 보다 더 했겠구나 싶었다. 이런 유적은 잘 발굴하고 보존해서 우리 민족의 우수성도 설파하고 (이러면 너무 국뽕이 찬 건가?) 후대에게도 길이 남겨주면 좋겠다 생각이 들었다. 왕의 행차도 실제 보면 아주 멋있었을 것 같고. 그래, 우리는 지금 이렇게 Yankee들에게 무시당하고 3500억불씩 수탈당할 만한 민족이 아니야, 스스로 약간 위로하면서.
지금의 회암사는 작은 암자이지만, 역사가 깊고, 올라가는 길 오른쪽에는 무학대사의 부도탑이 있는데, 미적 감각이 별로 없는 내게도 아주 아름다와 보였다. (사진은 지난 겨울에 찍은 것)
기념관 안에는 다행히도 발굴된 각종 유물들이 잘 전시되어 있었다. 우리가 맨날 탄약고 옆에 있는 그냥 허름한 벌판이라고 생각했던 그 곳에, 조상들의 멋진 솜씨로 빚어진 각종 조각과 부조와 왕실의 도자기들이 묻혀 있었다니. 가끔 야간 경계근무때 철책 밖으로 소변도 보던 곳이었는데, 너무 후회가 되네...
"잡상 (雜像)" 이라고 표시된 각종 조형물들은, 절 처마위에 12지신상처럼 자리하고 있었던 각종 조각물들이라고 하는데, 너무 정교하고 사실적이면서도 역동적인 솜씨가 놀라왔다.
아무튼 조상님들의 솜씨에 감탄하고, 우리가 근무했던 부대 옆에 이런 역사적인 장소가 있었다니 감탄하면서, 오늘의 주 목적, 옛날 행군길 차로 가보기 (!)를 시작했다.
출발지는 지금은 사라진 보병 사단, 26사단 76연대 1대대 앞, 군복의 명찰이나 계급장, 휘장을 재봉틀로 꿰매어 부착해주던 그 가게도 없어지고, 우리가 행군길을 복귀하며 건너던 위병소 앞 작은 다리만 그대로 있었다. 맑고 깨끗한 개울에는 오리 가족들이 평화롭게 노닐고 있고. 군대에서의 동기란, 저 오리 가족만큼이나 끈끈했다. 서로 말 안해도 어디로 가고 싶은지 다 아니까. 근데 문제는 제대 후 포항에서만 몇 십년을 보낸 이 동기가 이쪽 지리도 모르고, 기억도 없다는 것. 이쪽으로는 오줌도 싸지 않겠다고 하며 지내왔으니 그럴 수 밖에. 내 가이드 역할이 필요한 시점.
회암사지 옆에 있던 부대에서, 매일 아침 윗통벗고 구보로 선착순하던 용고개를 넘어, 동두천시 장암동의 수려한 계곡을 꼬불꼬불 지나면, 연천과 포천의 갈림길에 선다. 여기서부터는 왕복 1차선 오르막. 그나마 지금은 포장도로가 되어있네. 정상 무렵에는 예래원이라는 대형 공원묘원이 있는데, 전에 90년~91년 무렵의 황량하고 덜 준비된 모습과는 달리, 지금은 아주 깔끔하고, 잘 정리된 모습이었다. 성묘객들의 차와 마주치면 서로 교행을 위해 눈치껏 양보하고 기다려야 하는 순간들이 반복되었다. 사실, 이 길이야말로, 우리 부대가 행군때 매번 지나다니는 길이었는데, 해발 750미터 정도 밖에 안되지만, 정상 직전의 긴 부분이 너무 가팔라서 매번 낙오병을 양산하던 곳이었다. 갈 때나, 올 때나, 이미 대여섯 시간 이상을 걸어온 상태에서, 25Kg넘는 완전군장의 어깨끈과 K2의 무게가 어깨를 파고드는 아픔과, 딱딱하게 굳어버린 허벅지, 숨이 턱에 차있는 상황과, 비오듯 쏟아져서 상의를 적시는 땀과 갈증, 이런 것들 때문에 "국사봉" 이라는 단어는 우리 모두에게는 약간의 두려움을 주던 단어였다. 저 아득한 산 밑에서부터 여기까지 오는 것 자체가 도전이었는데, 옆에서는 지금도 평안히 영면에 드신 분들...
이 길은 사진보다 가파르다. 경사가 거의 35도 정도인 듯. 이 지점은 정상에서 내려가는 길이고 지금은 이렇게 포장되어 있지만, 전에는 다 흙과 돌이 뒤섞여 전투화를 신어도 삐긋거리는 상태의 길이었고, 역시 훈련 복귀 시에는 결국 다시 또 올라와야 할 길이었다.
우리는 둘이서 한참을 떠들었다. 그때 이병 일병 누구 누구가 낙오했었고, 화기분대 누구 때문에 M60을 분대장인 내가 메어야 했으며, 추워도 행군에는 방해가 되기 때문에 금지했던 쫄쫄이(하의 스타킹의 일종)를 몰래 입고 온 누가 여기서 결국 낙오했고, 어쩌구 저쩌구... 오십대 중반의 두 남자가 아무도 없는 산길에 서서 수다떠는 이 말들은 아무도 듣는 다른 이 없이 나무들과, 바람속으로 흩어졌지만, 둘은 유쾌할 수 밖에. 그 시절의 빡빡머리 청년 둘이서 지금 초로의 중년이 되었지만, 우리는 차로 간다구 지금! 걸음 No!
내려오면서, 그 무덥고, 힘들고, 배고프고, 목말랐던 여름밤, 소리를 듣기만 하면서 입을 대고 마시고 싶은 간절한 충동도 소용없이, 바람처럼 지나가야 했던 젊은 병사들의 갈증을 끝없이 더해만 주던 작은 계곡들의 물 흘러 내리는 소리들을, 둘은 아무 말도 없이 한동안 귀로 빨아들였다...
우리는 차를 몰아서 최종 숙영지였던 한탄강변 전곡읍 옆의 강변에 도착했다. 내려오면서 보니, 이 길도 그렇게 길었구나 새삼 느꼈다. 거의 8시간을 걸어 온 그 어린 아이들이, 다시 또 거의 3시간을 걸어야 했던 먼 길. 모퉁이를 돌면 멀리 반짝 반짝 빛나던 민가의 불빛, 다시 또 모퉁이를 돌면 끝나나 했는데, 이어지는 꼬불길. 달빛 아래 하얗게 펼쳐진 흙길이 꾸불꾸불 한없이 이어졌던 그 아득함. 도착해도 쉬는게 아니라, 또 텐트를 쳐서 숙영지를 준비하고, 식사 후 경계근무에 돌입해야 했던 그 당시의 스무살 짜리 나와 동기, 그리고 수많은 부대원들. 그 당시 강 건너편 성재산이라는 곳에서 며칠 훈련을 하고, 나중에는 올라 올라 연천과 철원을 거쳐 부대로 복귀하는 100km 철야 행군의 시작점. 혹한기 훈련 때면, 성재산 쪽에서 단정을 타고 강을 건너 이 모래사장으로 도착해야 하는데, 분대별로 속도 경쟁을 했었다. 단정은 목봉만큼 무거워서, 늦으면 기합을 받으면서 거의 팔이 빠지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그 와중에 나는 엉뚱하게도 내 전투화 만큼은 젖지 않으리라 가소로운 희망을 품고 열심히 노를 저었지만, 매번 그 희망은 건너편 모래 사장에 도착하면 깨어졌다. 자세를 잘 잡아야했기 때문. 추운 겨울에 전투화까지 강물에 흠뻑 젖으면 그날 밤은 침낭안에 냄새나는 내 전투화를 끌어안고 자야했으니. 그 모래밭은 지금 보니 너무 작아져 있었다.
지금은 전곡 역사가 크게 들어서고 강변에는 온통 빌라들 뿐. 우리는 그래도 행군의 모든 길을 다 한 번 돌아봤다는 뿌듯함으로, 남들이 보면 참 이해못할 하이파이브를 하고, 다시 차를 돌렸다.
사실 내가 먼저 연초에 갔다와서 얘길 하고 사진을 한 장 보내줬더니, 이 동기가 꼭 자기도 가보고 싶다고 외근 길에 혼자 지나갔었단다. 그런데, 매번 아침 구보를 하던 저 칠봉산의 바위들을 언뜻 보니, 갑자기 가슴이 뛰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거의 6개월이 지나 시간을 내서 다시 온 것인데, 나는 동기놈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너무 힘들었고, 모진 사람들도 많이 만나서 다시는 그쪽으로는 오줌도 안눈다 라고 다들 얘기하지만, 갓 스물 스물 한 살 청년들이 모여서 부대끼며 치열하게 살았던 그 2년 반을 어떻게 완전히 우리 가슴속에서 지운단 말인가?
가슴이 뛰는 것은, 우리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 우리는 비록 나이는 들어가지만, 마음과 영혼은 젊은 그대로 익어갈 뿐 아닐까? 노사연 누님의 노래처럼 "우리는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
오다가 옛 고참한테 스피커 폰으로 전화도 하고, 거기서 얻은 전화번호로 옛 중대 선임하사 (계급은 중사) 님께 전화도 하고. 원사로 전역하시면서, 아마도 수천명의 사병들을 내보내셨을 텐데도, 나와 동기를 기막히게 기억하시고, 당시 같이 있던 중대장, 소대장, 하사와 병장들 이름을 줄줄 읊으시네! 와, 이건 정말!!!
되도록 많이 모아서 같이 한 번 오라고 하시니, 다시 연락망 가동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우리는 행복한 행군길 다시 가보기를 끝냈다.
나와 동기의 행복했던 하루! 우리 젊음은 거기서부터 비로소 익기 시작한 것이었다. 우리는 늙어가지만 또 지금 익어가고 있다고!
추신) 댓글에 이미지가 첨부가 안되어서, 부득이하게 사후 글 추가. 부대 마크는 남기고 싶어요. 우리는 저 마크를 "해가 뜨나 달이 뜨나 X뺑이" 라고 불렀어요. 그리고 그 때는 기보도 아니었쟎아요. 말 그대로 알보병. 함 덕선 사단장님께는 정말 죄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