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엄마가 없는 아이 현우,
녀석을 그렇게 만났다.
한 번의 포옹으로... 녀석은 나에 대한 경계심을 무장 해제한 채 가끔씩 내가 놀이터에 나가는 날이면 반색하며 우리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어차피 같은 아파트 단지의 엄마들과는 시간이 맞지 않아 또래 아기 엄마들 커뮤니티에는 낄 엄두도 못 냈다. 직딩엄마의 비애였다. 놀이터에는 보이지 않는 그룹이 있었다. 쇼핑을 같이 가기도 하고 같이 밥을 먹으러 가기도 하면서 거의 매일 만나 교육 정보를 나누며 다져진 모임이어서 나처럼 가끔 놀이터에 출몰하는 여자는 외면당했다.
원래 어떤 무리에 끼는 것을 불편해하는 나는 그 문화를 남몰래 다행스러워하며 아이랑만 단둘이 우리들만의 놀이에 심취해 있었다. 현우 할머니도 열외이긴 마찬가지였으나 할머니들의 커뮤니티가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 끼어 시간을 보내고 계셨다. 무리에 손주를 돌보지 않는 할머니들이 수적으로 더 많았는지 현우가 끼어들면 분위기가 깨지기 일수였다. 눈치 빠른 요 녀석은 얼른 우리 팀으로 합류했다. 나는 꼬맹이 녀석과 친구를 먹었고 그렇게 우리는 이른바 절친이 되었다.
녀석에게 집에서 싸온 간식을 나눠 주기도 하고 코를 닦아 주기도 하며 현우 엄마가 일 나간 사이를 조금이 나마 메꿔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아이들과 시간을 보냈다. 아이도 현우를 잘 따라다녔다. 녀석의 이름은 현우였다.
한날은, 시멘트 바닥에 분필로 별을 그리며 놀고 있는데 그날따라 놀이터에 늦게 출근(?)한 현우가 눈을 반짝이며 다가와 내가 그린 그림을 와 와 거리며 감상해 주었다.
"고모"
현우는 나를 <아줌마>라고도 <이모>라고도 부르지 않았다. 그 대신 <고모>라고 부르고 있었다. 바닥에 철퍼덕 앉던 아이는 내가 전해주는 색색의 분필들로 금세 근사한 그림을 그려내고 있었다. 아이 치고는 예사롭지 않은 솜씨였다.
"우와 우리 현우가 그림을 정말 잘 그리는구나! 별을 고모보다 더 잘 그리네?"
아이는 으슥해하면서 계속 계속 그림을 그렸다. 동생에게 조잘조잘 설명을 해가면서...
다음날 만났을 땐 내게 돌돌만 꼬깃한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 선물이야. 고모"
" 고모는 현우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는데 어쩌지?"
" 괜찮아. 현우는 괜찮아"
" 괜찮긴... 현우가 선물을 줬으니깐... 가만있자... 고모는 현우한테 아이스크림을 선물하면 되겠다. 그지? 할머니께 가서 고모가 현우한테 아이스크림 사줘도 되냐고 여쭤보고 와"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할머니에게 허락을 받으러 내달렸다.
아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말려진 종이를 폈다. 가족을 그린 것 같았다. 색감이며 구도며 아이답지 않게... 게다가 창의력이 돋보이는 그런 그림이었다. 현우인 듯한 아이가 눈을 반달로 하고 가운데 있고 옆에 아빠인듯한 남자가 있고 다른 편엔 머리를 하얗게 칠한 할머니가 있고... 엄마가 없 었 다. 가슴이 아렸다.
신이 나서 달려오는 아이는 아마도 할머니의 허락을 받고 오는 길인 것 같았다. 현우를 데리고 다니느라 현우 할머니와도 안면을 터오던 사이였다. 할머니께 듣자니 현우는 내 짐작과는 달리 여섯 살이었다. 아이의 체구로 보아 많이 봐야 네 살 정도로 밖에 안 보였는데. 작은 아이였다 현우는.
제법 햇볕이 따가워진 오후, 체력이 방전되어 달달한 것이 당기던 차에 현우와 아까 했던 약속도 지킬겸 아이들을 이끌고 가게로 들어섰다. 가게 안에는 벌써 동네 꼬마들이 엄마 손을 잡고 가게로 와서 아이스크림 통에 코를 박고 아이스크림을 넣었다 뺏다 하느라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그 틈으로 지지 않고 현우도 끼어들어가 제맘대로 3개를 빼어 들고, 나와 아이와 저 모두 각각 다른 아이스크림을 쥐어주었다. 우리는 현우가 골라준 아이스크림을 받아 들었다. 값을 치르고 돌아서는데
" 고맙습니다. 고..."
녀석이 채 말을 맺기도 전에 동네 할아버지인 듯한 분이 기특하다는 듯 말끝을 채갔다.
" 아이고 새댁이 아이를 잘 키웠나 보네. 엄마한테 인사를 잘도 하네 곤석"
이러며 아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녀셕의 행동에 말릴틈도 없었다. 녀석은 버릇없이 할아버지의 손을 탁 뿌리치며 갑자기 하얗게 질린 얼굴을 일그러트리더니 나에게 까달라고 맡긴 아이스크림을 뽑아 들어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반만 까진 아이스크림이 바닥에 뒹굴었다.
'그러면 못 써. 누가 어른한테...'라는 잔소리를 하려다 아이의 얼굴이 너무 참담해서 관두었다.
" 고모는 현우 엄마 아니야... 화니 엄마야 "를 시작으로
현우는 원래, 엄마가 없어.
얼굴이 빨개져서는 중요한 낭독문을 읽는 듯이 또박또박 할아버지를 쏘아보며 앙칼지게 소리쳤다. 그리고는
" 현우는 워 얼래! 엄 마 가 없어!! 현우는 원래 엄마가 없다고 원래 없다고 원래 원래 원래"를 반복하며 발을 동동 구르며 울부짖었다.
당황한 어르신은
" 그래 인석아 알았다. 너 엄마 없어... 엄마가 없었구나... 나는 몰랐지...알았다고 할애비가 미안하다고 그러니까 일어나... 할애비가 꽈자 사주랴? 아이고 얘가 왜 이런디야?..." 라며아이를 달랬다. 그러나 아이의 무엇이 건드려진건지 그동안 아이에게 무슨일이 있었던건지... 아무리 달래고 얼러도 통하지 않았다.
현우는 <엄마>라는 소리를 듣자 발작하듯 더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의 땡깡에 어찌할 바를 몰라하던 노인은 쩝쩝 거리며 더 이상은 안되겠다는 듯 내 어깨를 톡톡 치더니 이내 쫓기듯 가게를 나가 버렸다. 아이는 달래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서러운 듯이 꺽꺽대며 얼마를 소리를 질렀는지 기가 넘어가 이제는 '혀누는 혀누는...'만 목 뒤로 넘기고 있었다. 아무리 달래도 소용없었다. 복잡한 가게안만이라도 일단 벗어났으면 싶었지만 한번 때가 난 아이는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엄마 없음을 기어이 알리고야 말겠다고 다짐한 아이처럼 꿈쩍도 하지 않고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울음소리와 꺽꺽 소리가 섞여 이미 무슨 말인지도 모를 소리를 안간힘을 써서 내벹고 있었다. 말려도 소용없음을 알 것 같았다. 가겟집 아주머니도 난처한 듯 바닥에 뒹구는 아이를 한번, 당황해하는 나를 한번, 번갈아 바라보고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엄마를 차가운 항아리에 넣어 남의 집 찬장 같은데 올려놓고 와 놓고도, 때가 되면 지 입에 밥을 쳐넣고 밤이 되면 잠을 쳐자는 스스로를 경멸하며 좀비처럼 살고 있었다.
나는 원래 곶감을 먹지 못했다.
엄마를 보내고 삼우제며 사십구제를 치르며 엄마가 평소 좋아하셨던 곶감을 제사상에 매번 올렸다. 한입 베어 물면 다시 엄마가 살아오실지도 모른다는 어른 답지 못한 상상을 하며 베어 물어봤지만 맛을 알지 못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애써 울음을 삼켜야만 겨우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었다. 세수를 하면서도 TV를 보면서도 잠깐 방심하면 툭하고 눈물이 흘렀다. 그렇게 눈물을 참는 것과 엄마의 부재를 실감하려 애쓰는 것을 반복하며 그것을 루틴으로 받아 들 일 때 즈음... 냉장고 구석에 있던 곶감을 발견했다. 족히 몇 달은 됐을 텐데 멀쩡해 보였다. 아는 맛이지만 다시 한번 베어 물어 버렸다.
...너무 맛이 있었다. 달콤하고 쫀득한 게 초콜릿과는 비교도 안 되는 깊은 달달함이 있었다. 뒷맛의 쌉쌀함도 좋았다. 젤리처럼 기계적이지 않은 쫀득함도 좋았다. 왜 그동안 이맛을 몰랐을까?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곶감이 너무 맛이 있어서...
오늘은 울어도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고 누군가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소리를 내며 온 방바닥을 기어 다니며 엄마를 부르며 울었다. 발버둥을 치기도 하고 발을 구르기도 하고 박수를 치기도 했다. 기괴하게 울부짖었다.
왜 그런 생각이 났는지 몰랐다. 일단 내게 매달려 있던 아기를 가겟집 아주머니에게 잠깐 안기고 몸을 낮춰 동그랗게 말고 바닥에 뒹구는 현우의 귀에 속삭였다.
" 현우야... 현우야?... 사실은... 고모도 엄마가 없어"
그때까지 바닥에서 몸살 지진을 치며 좀처럼 일어나려고 하지 않던 아이가 잠깐 망설이는 듯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리고는 울음 끝을 수습해 보려고 애쓰며 소매로 눈가를 훔치며 나를 바라보었다. 정말이냐고 묻는 듯 내 눈을 응시했다. 나는 진짜라고 아이 눈의 깊은 곳에 대고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꿈뻑꿈뻑해 보였다.
" 응? 고모도 엄마가 없어?"
아이는 바닥에 키를 낮춰 앉아 있는 나를 보고는 잠깐 무엇인가 생각하더니 애처롭다는 듯이 어른처럼, 작은 손가락으로 내 헝클어진 머리칼을 헤치고는 다시 한번 내 눈을 응시하며 되 물었다.
" 응... 고모도 엄마가 없어." 아이에게 얼굴을 맡기고 아이처럼 녀석과 눈을 맞추며 삐죽삐죽 그렇게 대답했다. 나는 어느새 내 아이의 삐죽이는 모습과 닮아 있었다.
녀석은 고맙게도 일어날 채비를 해주고 있었다.
이렇게 여섯 살의 원래 엄마가 없는 현우와 원래는 있었는데 이제는 엄마가 없는 서른여섯의 나는 가게 바닥에서 자리를 털며 함께 일어났다.
- The en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