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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피 Feb 02. 2022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새내기 만학도의 인생 고찰, 또는 현타  

  평소에 가구와 공간을 꾸미는 일에 관심이 많아 가구점을 둘러보는 것과, 색다르게 꾸며진 카페나 집 구경을 가는 것을 좋아한다. 코로나로 인해 외출이 제한되자 도무지 마음껏 구경을 갈 수가 없으니 어찌나 답답하던지. 인터넷으로 이런저런 것들을 찾아봐도 직접 보느니만 못한 욕구가 쉬이 채워지지 않는다. 이 참에 제대로 공부를 해보면 어떨까. 머릿속에만 존재하던 공간들을 직접 만들어 나가면 얼마나 멋질까. 그렇게 어느 날, 학교로 돌아가기로 결심을 했다.


  대학을 졸업한 지 십여 년 만에 만학도의 신분으로 다시 학생이 된다는 건 생각보다 설레면서도 귀찮은 일이었다. 사실 처음부터 대학에 등록하면서까지 배울 생각은 없었다. 디자인으로 유명하다는 학교의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 이것저것 살펴보다 더 자세한 정보를 얻고 싶어 전화번호를 기재한 것이 실수라면 실수였다. 다음날 모르는 번호에서 온 전화를 덜컥 받아버린 것 또한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입학처에서 온 전화였는데 담당자는 신이 나서 이런저런 질문세례를 퍼부었다.


  사실 내가 그렇게 의미 있는 학생인가, 하면 결코 그렇지 않다. 코로나로 인해 국경이 닫혀버려 넘쳐나던 수많은 유학생들이 돌아오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자 학교 측에서는 한 명 한 명이 너무나도 소중했을 테다. 연속적인 우연이 만들어준 필연으로 얼떨결에 다시 학교에 발을 들였다. 그때부터 한 사람의 아내이자 아이 둘의 엄마, 치과 의사, 그리고 디자인 학도로서의 다중 삶이 시작되었다.


  과학과 수학에는 답이 정해져 있다. 밝혀지지 않은 수많은 이론과 논리와 현상들은 답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미제로 남은 것이지 나만의 해석을 내놓고는 그것이 답이라 여길 수는 없다. 치과의로서 진단을 내리거나 치료 방안을 제시할 때에도 개인적인 의견이 아니라 과학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두어야 한다. 매년 학회에 참석하고 논술 자료를 뒤져가며 끊임없이 배워야 하는 이유이다. 학창 시절부터 논문을 읽고 답을 찾아 제출하고, 많은 것들을 외우고 소화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나에게 예술은, 속된 말로 멘붕의 연속이다.  소설 ‘데미안’ 속 주인공 싱클레어라도 된 듯 알을 깨고 나오는 나 자신이 기특하게 느껴진 것도 잠시, 현실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어찌 된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정해진 답이 없다. 자꾸만 배경과 이론에만 집중하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습관이란 게 이렇게 무서운 것이구나 느낀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그것에 대한 나만의 해석을 제출하라는 것은 마치 새로운 수학 공식을 발견하라는 것과 같다. 계속해서 확인받고 싶고 이것이 맞는가 확신이 서질 않는데 내가 생각하는 것이 곧 답이라 한다. 정답이 없다고 한다. 정답 없는 결과물을 제출하려니 지난날 익숙했던 방식이 부정당하는 느낌마저 든다. 어쭙잖은 꿈보다 더 어쭙잖은 해몽을 써 내려가며 햇병아리 만학도는 창작의 고통과 짜릿함을 동시에 맛보는 중이다.


  그 와중에 내 맘에 쏙 드는 과제가 하나 있었는데, 특이한 건축물을 찾아 사진을 찍고 그대로 그려보는 것이었다.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과제였다. 이토록 원하는 것이 정확한 과제라니. 답은 간단했다. 최대한 똑같게 그리면 된다. 따라 하는 것은 곧잘 하는 나에게 꺾여 있던 의지와 땅 끝까지 파묻혔던 의욕이 샘솟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것이 전쟁의 서막이라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말이다.


  인간의 눈과 뇌는 굉장히 편파적이다. 보고 싶은 것을 보고 익숙한 것을 인식한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보이는 모든 것을 입력하고 처리하려면 과부하가 올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구미에 맞는, 혹은 눈길을 끄는 것에 집중하며 왜곡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같은 것을 바라보아도 다르게 해석됨이 그 이유이다.


  아이와 함께 읽었던 동화 한 편이 생각난다. 굉장히 커다란 돌을 발견한 다람쥐 한 마리가 동물 친구들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하자, 믿지 못한 토끼가 가서 확인한다. 자신의 몸뚱이보다 작은 돌에 실망한 토끼가 여우에게, 여우는 곰에게 이야기를 전하고 확인하는 과정에서 다람쥐의 몇 배나 되었던 돌덩이가 실은 곰의 두 손보다도 작았다는 이야기이다. 실제로 보고 느끼는 것이 객관적인 절차를 거쳤을 때 우리가 알고 있던 것과는 상이하게 다를 수 있다.


  과제를 하면서 미숙한 그림 실력보다 더 당황스러웠던 것은, 보이는 것과 실재하는 것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빛의 각도와 자리 잡은 위치에 따라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른 건축물의 모습과 느낌이 드러났다. 색을 구분하는 원추세포와 빛을 감지하는 간상세포가 그 시각 어떤 색에 반응을 하는지와, 주어진 시야각의 차이에 따른 것이라는 게 과학적 설명이라면,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보이는 것을 한정적으로 인지하고, 그것이 다양한 감정과 착시 현상을 일으킨 다는 것이 좀 더 예술적인 설명이려나.


  다면적인 건물을 한눈에 담으려는 것 자체가 무리한 시도일 수 있으나 어쩌면 그것을 깨닫는 것이 과제의 의도였는지도 모른다.  내가 보는 것은 극히 일부이고 있고 다른 이가 보는 것과 전혀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는 것. 그것은 비단 건물에만 국한되는 말은 아니다. 답이 정해져 있는 문제들보다 복잡한 삶의 문제들은 그런 의미에서 예술과 좀 더 가깝다. 단면만 보고 단정해 버리기엔 삶은 다채롭고 변화무쌍하며 심층적이다.  

 

  눈앞에 있는 공연장을 보며 어릴 적 엄마와 보았던 어린이 뮤지컬과 돌아오는 길 소매치기를 당해 슬퍼하던 엄마의 표정이 떠오른다. 삼십여 년도 더 된 일이지만 생생히 기억나는 그날, 엄마는 오십만 원이라는 큰돈을 지하철에서 소매치기당했고 그 사실을 안 할머니는 아빠의 주머니에 돈을 찔러주며 맛있는 것을 사주라고 했다. 뜻밖의 외식에 들떠 있던 나와는 다르게 엄마의 표정은 내내 좋지 않았다.


  흥미로운 건 그날 어떤 뮤지컬을 봤는지 처음 간 큰 공연장의 느낌은 어땠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속상해하던 엄마와 각자의 방식으로 엄마를 위로하던 할머니와 아빠, 그리고 나의 모습만이 선명할 뿐이다. 그림을 그리는 내내 그날의 일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같은 건물을 그린 나와 다른 학생의 그림이 상이하게 다르다면 분명 그날의 기억도 한몫했을 테지.


  기억이란 이렇게 편파적이다. 우리가 보는 것들도 결국엔 눈이 전하는 정보를 뇌가 해석하고 인식하는 그 짧은 찰나의 기억 속에 존재하고 저장됨으로, 시각과 기억은 서로 얽히고설킨 존재이다. 이왕 편파적인 김에 좀 더 친절하게 왜곡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삶을 바라보는 시선과 마음에 타인에 대한 친절뿐 아니라 자신에 대한 친절을 담아 나를 좀 더 보듬어주고 싶다. 끊임없이 채찍질하며 달려온 지난날의 결과로 이 척박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어찌어찌 살아가고 있지만 과연 ‘잘’ 살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은 남는다. 답이 없는 문제에 나만의 답을 제시한다는 것은 나에겐 예술이자, 삶 이자, 알을 깨고 나오는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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