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적인 아무 말 대잔치
최근에 나는 유리컵의 물자국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정확히는, 설거지를 끝내고 건조대에 올려둔 컵을 다시 들었을 때, 하얀 물방울 자국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물리적으로는 설명이 가능한데
정서적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자국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정도 규모의 자국 앞에서 내가 너무 큰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내가 사는 곳이 미국이라 그런지
물만 말려도 사소한 자국들이 유난히 잘 남는다.
미국 석회수의 위력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물 한 번 마셨을 뿐인데 컵은 매일 새 패턴을 얻는다.
어떤 날은 화면 노이즈 같고,
어떤 날은 점묘화가 시도되다 만 흔적처럼 보인다.
여기서 더 말하면 물자국이 아니라 내 머릿속이 먼저 노이즈를 낼 것 같다.
나는 잠시 이 현상을 ‘흔적’ 개념으로 읽어 보려 했다.
데리다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이건 데리다가 좋아할 흔적이다.”
말해놓고 나서 바로 후회했다.
그냥 석회가 말라붙은 건데
굳이 데리다를 부엌으로 호출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러나 이미 입 밖으로 나온 순간
나의 일상은 불필요하게 철학화되었다.
(이쯤 되면 나도 민망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 하얀 점들의 모임이 나에게 어떤 구조를 암시한다.
지우려 하면 더 선명해지고,
흐르다 멈춘 자리마다 작은 기록이 쌓인다.
이건 거의 팔림프세스트다.
물론 중세 사본이 아니라
내가 어제 씻은 컵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팔림프세스트는 중세 사람들이 양피지가 비싸서 지우고 또 쓰다 보니,
밑에 있던 글이 얌전히 지워지지 않고
계속 ‘나 여기 있었음’ 하고 올라오는 기록이다.
심지어 자외선을 비추면 아르키메데스 글이 다시 나타났다고 한다.
(이쯤 되면 문서가 아니라 고집 있는 영혼이다.)
왜 사소한 자국에 이런 수준의 단어를 쓰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아마 설거지가 생각보다 철학적이지 않아서
괜히 내가 보상을 하는 걸지도 모른다.
여기서 이상한 점은
나는 컵을 깨끗하게 만들겠다고 노력했는데
그 결과가 더 많은 흔적을 발견했다는 사실이다.
투명하다는 건 원래 이런 걸까.
없애려는 마음이
오히려 남아 있던 것들을 더 밝히는 구조 말이다.
이건 우연이 아니라 패턴 같다.
정리한 공간일수록 사소한 어긋남이 더 눈에 띄듯,
깨끗해진 컵일수록 작은 자국이 더 선명해진다.
생각해 보니 꽤나 불편한 진실이다.
나는 투명해지려고 애쓰는 순간마다
더 많은 물방울 자국을 얻고 있으니까.
그래서 결국 나는
컵을 한 번 더 닦았다.
내가 이긴 건지 석회수가 이긴 건지 모르겠다.
일단은 비긴 것으로 해두기로 했다.
결론은
석회수로 컵을 씻으면 행주로 닦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