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적인 아무 말 대잔치
최근에 저는 텀블러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정확히는, 집에 비슷한 컵이 여러 개 있는데도
예쁜 디자인을 보면 또 사고 싶어지는 나를 보고
잠깐 멈칫했기 때문이다.
왜 그런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아마 '필요'와 '갖고 싶음' 사이에서 인간은
늘 후자 편을 들어주는 쪽으로 설계돼 있는지도 모른다.
(저는 공학자가 아니다.
그냥 그렇게 느껴졌을 뿐이다.)
매장에 들어가면, 컵들은 유난히 자신감이 있다.
대부분의 상품은 “사주세요”라는 표정을 짓는데,
텀블러는 “이미 갖고 있겠지만요?”라는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나는 그 표정 앞에서 자주 흔들린다.
진열대 위에서 반짝이는 텀블러의 광택은
음료를 담는 용기라기보다
내 하루의 태도를 담는 기호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건 컵이 아니라,
태도의 액세서리다.
이 표정과 광택을 '기분'이라고만 부르기엔,
너무 체계적으로 나를 흔든다.
'그냥 예뻐서'라고 말하기엔
예쁨이 너무 전략적이다.
이쯤 되면 컵은 컵이 아니다.
마르크스가 이 장면을 본다면
작은 물신주의 한 장면이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물건이 원래의 용도보다 더 많은 의미를 떠안고,
우리는 그 의미를 사는 척하면서 사실은 물건을 산다.
컵은 음료를 담는 기능을 넘어서
정체성의 작은 신전이 된다.
나는 그 신전에 동전을 바치며
'이건 환경을 위한 선택이야' 같은 말을
속으로 중얼거린다.
물론 환경을 생각하는 건 좋은 일이다.
다만 내가 그 말을 떠올리는 타이밍이
대체로 결제 직전이라는 점이
조금 수상할 뿐이다.
윤리의식은 이상하게도
카드 결제 소리를 들을 때 가장 강해진다.
더 수상한 건 집에 돌아가면 벌어진다.
집에는 이미 텀블러가 있다.
정확히는 비슷한 컵들이 있다.
그들은 식기장 어딘가에서
서로를 닮은 얼굴로 층을 이루며 쌓여 있다.
나는 가끔 그 컵들을 보며
이게 컵의 컬렉션인지
나의 망설임들이 고체화된 것인지
헷갈린다.
식기장은 조용한데, 망설임은 단체로 살고 있다.
한때는 '이 컵은 여행 갔을 때 샀지'라는 기억이 있었고,
또 한때는 '이 컵은 시즌 한정품이야'라는 마음이 있었고,
또 어떤 컵은 그냥 '예뻐서'였다.
컵은 용기인데 이상하게도 내 과거의 기분을 담고 있다.
그래서 새 컵을 살 때마다 나는
컵을 하나 더 들여놓는 게 아니라
내가 지나온 어떤 시기를
하나 더 선반에 올려놓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추억은 원래 가벼워야 하는데, 컵은 생각보다 단단하다.
사회학적으로 말하자면
이건 상징 자본의 축적일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내 상징 자본이
컵처럼 가벼운 물건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 말을 하면서도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컵을 내려놓지 못한다.)
상징 자본은 원래 손에서 시작되는 걸까.
손이 먼저 믿고, 머리가 나중에 따라온다.
텀블러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그것이 선한 소비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일회용 컵을 줄이고,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고,
지구를 생각하는 라이프스타일.
그 모든 문장들이 컵 표면에 얇게 코팅돼 있다.
그래서 우리는 컵을 살 때
물건을 산다는 감각보다
태도를 산다는 감각을 먼저 느낀다.
태도는 눈에 안 보이지만,
텀블러는 유광으로 보이니까.
하지만 어떤 날은 이런 생각도 든다.
나는 정말로 태도를 산 걸까,
아니면 그냥 예뻐서 산 걸까.
그리고 이 질문은 늘
가장 늦게 온다.
그런데도 나는 또 흔들린다.
예쁜 디자인이 나오면
손이 먼저 진열대로 간다.
그리고 나는 다시
'그래도 이건 오래 쓰잖아' 같은 문장을 꺼낸다.
나는 태도를 산 게 아니라,
태도를 샀다는 말을 살 수 있는 상태를 산다.
그래서 결제 직전에 윤리가 제일 유창해진다.
말이 먼저 깨끗해지고, 손은 이미 바쁘다.
그렇다고 해서 결론이 비관적일 필요는 없다.
컵을 사는 일도, 그걸 예쁘다고 느끼는 일도,
그걸 들고 어딘가를 가는 일도,
어쩌면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의 일부다.
문제는 인간이 ‘방식’이라는 단어를 너무 잘 쓰게 된다는 점이다.
아무튼 결론은 하나다.
당분간 새 텀블러는 사지 말아야지.
다짐은 가볍고, 식기장은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