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핌 Feb 20. 2022

06. 새로운 모험의 시작, 필리핀

10년간의 제주 이주의 여정, 잠시 멈춤

갑자기 필리핀


제주도의 겨울은 추웠고, 귤밭 말고는 별다른 일이 없었다.

제주도의 일반 회사에 취직을 하는 것도 알아보았지만, 일반 사무직의 경우 대부분 6일 근무에 서울에서 받던 연봉의 절반 수준이었다.


그즈음 이탈리아 대형 크루즈의 승무원으로 일을 하는 친구 J가 함께 머물고 있었는데, J의 삶의 패턴을 보며 또 다른 가능성에 눈을 돌려 보기로 했다.

J는 크루즈의 운항 스케줄에 따라 일정기간 선상에서 근무를 한 뒤, 육지에서 몇 달간의 휴식기간을 보내고 다시 배를 타러 가곤 했었다. 한국 매니저로 이탈리아 크루즈의 고객을 케어해야 하는 일과 몇 달간의 선상 생활이 많은 스트레스를 동반한 고된 일이기도 했지만, 쉴 때는 확실하게 쉴 수 있었다. 그런 J를 보면서 외국에 나가서 일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운 겨울에는 따뜻한 나라에서 일을 하고, 다시 돌아와 제주도의 여름을 맘껏 즐기리라 말도 안 되는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가능하려면, 일단 외국어가 가능해야 했다.


- 10년 전의 일들이라 기억이 적확하지 않을 수 있다. 오류가 있을 수 있는 점 미리 양해를 구한다. -


정리가 안된 잡다한 생각들로 머릿속이 복잡한 와중에, 이런저런 구인광고를 뒤적이다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사진 촬영 및 포토샵 가능자. 숙식제공. 어학연수기회. 필리핀 왕복 항공권 제공.'

급여가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어학연수를 할 수 있고, 항공권과 숙식을 제공해 준다니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겨울방학 시즌에만 일을 하고 오면 되는 것이라 봄에 다시 제주도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무턱대고 구인광고만 믿을 수 없는 것이 세상일이라 반신반의하며 이력서를 넣어 보았다.

얼마 뒤, 구인광고를 올린 사장님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육지로 면접을 보러 갔다. 카페에서 사장님을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내가 하기 될 일은, 필리핀 골프장에서 겨울 방학 시즌 방문하는 한국 여행객들을 대상으로 사진을 찍어주고 기념품을 만들어 판매하는 일이었다.

형제 두 분이 하고 있는 사업으로 면접을 나온 건 형님 사장님이었는데, 매년 필리핀 골프장과 계약 맺어 진행을 해 왔다고 설명을 하며 이전에 일했던 사진들을 보여 주셨다. 작년에는 남자 대학생 들로만 구성했었는데 크고 작은 문제가 있었던 터라, 이번에는 사회 경험이 있는 여성팀을 구상하셨다고 하였다. 구인 광고 만으로 사람을 믿기 어려운 세상이라는 걸 안다며, 사장님은 본인의 가족사진과 필리핀에서 일했던 지난 행적들을 보여주시며 나를 안심시켰다.


면접을 보고 온 뒤, 잠시 고민에 빠졌다.

가도 될까? 믿어도 될까? 잘하는 일인가?

하지만 이미 마음은 따뜻한 필리핀의 해변을 거닐고 있었다.

적응도 하기 전에 찾아온 제주도의 차가운 바람을 피해 도망치듯 필리핀으로 향했다.



판단은 당신이


필리핀행을 결정하고 일주일 뒤 출발 일정이 잡혔다.

3명이 한 팀으로 가게 될 거라는 설명과는 다르게 공항에는 나와 다른 친구 둘 뿐이었다. 출발 직전 한 명이 못 가게 되었다며, 다른 사업일정으로 바쁜 형님 사장님을 대신해 인솔을 맡은 동생 사장님이 설명을 해 주었다.


동행을 하게 된 H는 20대로, 미대를 졸업하고 워킹홀리데이를 가기 전 어학연수를 위해 지원을 했다고 하였다. 똑 불어지는 성격의 귀엽고 발랄한 친구였다. H도 처음 도전해 보는 필리핀행 일자리에 적잖이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서로를 만나 조금의 안심과 의지가 되어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필리핀에 도착하고 그 시작은 모든 것이 순조로운 듯했다.

동생 사장님은 우리가 지낼 숙소를 계약하고, 일을 해야 할 골프장과 주변 지역을 구경시켜 주셨다.

아는 지인을 통해 구한 일대일 외국어 선생님과도 인사를 나누고 수업에 들어갔다.

적어도 사기를 당했다거나, 팔려와 위험한 상황에 처할 걱정은 없어졌다.

돈도 벌고, 영어도 배우고, 여행도 할 수 있겠다는 나의 기대가 이루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상황은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았다.

기념품 제작을 위한 필수 요소인 프린터기가 말썽이었다. 골프 칩, 액자, 매달 등의 기념품을 만들기 위한 사전작업을 하는 중 한국에서 가져온 프린터기에서 계속해서 줄이 가는 현상이 발생을 하였다. 출력 품질이 떨어지면서 제품의 퀄리티가 낮아서 판매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현지에서 프리터 기를 수리를 할 수 있는 곳도 찾기 어려웠고, 성능 좋은 프리터를 구입할 곳도  또한 마땅치 않았다. 전화기를 붙들고 프린터기를 눌러가며 형님 사장님과 동생 사장님의 통화가 길어졌다.


설상가상, 골프장과의 계약이 문제가 되었다.

매년 겨울방학 시즌 단발성으로 진행하는 곳이라, 현지 골프장의 협조가 절대적이었는데, 뒤를 봐주던 지인의 영향력이 약해지며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된 것이었다. 기념품 판매가 수익이 된다는 것을 알고 다른 쪽에서 선점을 한 터였다. 동생 사장님은 현지 인맥을 동원하여 다른 골프장에서 사업 진행이 가능한지 알아보기 시작했다.

동생 사장님이 동분서주 골프장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 사이, 우리는 프린터 문제를 해결하고 기념품을 만들 준비를 마쳤고, 한동안 지낼 숙소에 필요안 물품과 식료품도 구입을 했다. 어학연수 선생님과도 수업을 이어가며 화려한 필리핀의 밤거리를 구경 다녔다.


얼마 뒤 동생 사장님은 문제가 해결됐다며 우리를 다른 골프장의 현장으로 데려갔지만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우리의 방문을 전달받지 못한 골프장의 현장 담당자가 입구에서부터 가로막았던 것이다. 동생 사장님은 이야기가 다 된 일이라며 항의했지만 담당자는 확인이 필요하다며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몇 시간의 기다림과 수많은 전화 통화 끝에 우리는 골프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처음의 계획 대로라면, 골프장 소속의 부스에서 기념품을 파는 일이었다.

라운딩 시작 전 신청을 하면 1홀 정도를 따라가 사진 촬영을 해주고, 그 사진으로 기념품을 만들어 기다리고 있다가, 라운딩이 끝나고 나가기 전 신청자가 기념품 부스에 들려 구입해 가는 방식이었다.

상황이 바뀐 지금, 우리는 부스도 없는 골프장의 입구에서 호객을 해야만 했다.

골프장 입구에서 수많은 팀들을 지나쳐 보내며, 여러 번의 시도 끝에 골프 관광을 온 어느 한국팀을 촬영하게 되었다. 시범을 보여준다는 동생 사장님을 따라 함께 1번 홀로 향했는데, 촬영을 하는 사장님 옆에서 나는 촬영 보조를 하였다.


필리핀에 골프관광을 온 한국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무엇이 들은 것일까?

뉴스에서 나라망신이라며 필리핀 성매매 관광의 심각성을 떠들어 대던 게 떠올랐다.

사진기를 매고 호객을 하는 우리의 모습이 그들에게는 전날 밤 마주친 유흥가의 여는 여자들과 다르게 보이지 않는지, 눈 빛과 말투가 희롱으로 이어졌다.

말 한마디에 소름이 쫙 끼치고, 그냥 보고만 있을 뿐인데도 머리털이 쭈뼛거리는 불쾌감이 들었다.

이렇게는 안 되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형제 사장님들도 난감하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매년 계약했던 골프장은 다른 업체에 빼앗겼고, 새로 약속한 골프장은 비협조 적이었다. 부스가 없으니 현장 판매가 어려워 사진만 찍어준 후 가이드를 통해 기념품을 전달하고 후불로 돈을 받아야 했다. 돈을 벌기 위해 사람은 데려다 놨는데, 수익이 날 수 있을지 없을지 불투명한 상황. 면접을 봤던 형님 사장님은 한국의 일이 정리되지 않아 필리핀에 올 수 없었고, 동생 사장님도 필리핀 상황이 안정되면 우리에게 현장을 맡기고 한국에 가봐야 한다고 했다.


빠르게 상황 판단을 하고 입장을 결정하고 머릿속으로 해야 할 말들을 정리하는 사이, 함께 있던 H의 감정 섞인 항의는 동생 사장님과의 말다툼으로 번지고 있었다.


1. 약속한 근무 조건과 다른 상황을 만든 것은 사장님들의 불찰임

2. 비 협조적인 골프장에서 사장님들 없이 우리 둘만 영업을 하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함

3. 그럼에도 계속하겠다면 받아들여야겠지만, 영업 이익이 발생하리라고 장담할 수 없음

선택 1. 현 상황을 유지하며 불확실한 수익을 기대해 본다.

선택 2. 부스가 있는 골프장을 계약하여 진행하는 게 아니면, 영업을 포기한다.


판단은 사장님들에게 넘겨졌고, 두 사장님들은 기나긴 통화 끝에 이번 필리핀 사업을 접기로 결정을 했다.

아무래도 우리 둘만 필리핀에 남겨두면 소요되는 경비 대비, 기대했던 수익을 얻기 힘들다고 여겼을 것이다.

우리는 처음 약속받았던 항공권과, 필리핀 도착일부터 당일까지의 급여를 받고 숙소를 떠나게 되었다.


그 와중에 3명의 팀원 중 공석이 된 한자리를 메우러 J를 불렀으니, 도착한 다음날 떠나야 하는 J는 여러 가지로 황당했을 것이다. 필리핀에서의 여정을 이대로 마무리하기는 아쉬워 우리 셋은 의기투합하여 항공권 날짜를 바꾸고 필리핀의 휴양지로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휴식의 시간


야심 차게 출발한 필리핀 취업은 뜻하지 않은 상황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무엇하나 쉽게 흘러가는 것이 없었다.

사고 없이 무사하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으며, 이미 벌어진 일!

지난 일은 털어 버리고 여행을 즐기기로 했다.


뒤늦게 합류한 J의 필리핀 지인의 도움을 받아 바탕가스 마비니로 향했다.


아름다운 마비니의 바다 바로 앞 그림 같은 리조트는 그야말로 낙원이었다.

겨울의 방문객은 우리뿐이라 리조트를 전세 낸 듯했다.

비어있던 야외 수영장에 우리를 위한 물이 받아졌다.

12월의 필리핀은 따뜻하고 온화했다.



손님의 수 보다 많은 직원들이 각자 자신의 업무를 하며 우리를 위해 움직였다.

매일 아침 깨끗한 침구를 갈아주고, 불편한 게 없는지 살뜰히 챙겨 주었다.

요리 담당은 호텔식 블랙퍼스트를 가져다주며 뿌듯해했고, 리조트 앞 야자나무에 올라 야자열매를 따주기도 했다. 제주도의 야자나무와는 달리 필리핀의 야자는 나무마다 열매가 주렁주렁 열려있었다.

저녁식사로 바비큐를 주문한 날이면 땀을 뻘뻘 흘려가며 그릴에 닭이며 소고기를 구워주었다.

트라이씨클(오토바이 옆에 수래가 달린 운송수단)을 불러 시내로 나가 시장을 구경 다니고, 다이버 샵에 신청을 하여 스쿠버 다이빙도 즐겼다.

따뜻하고 잔잔한 바탕가스의 바닷속은 반짝반짝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바다에 취해 바닷속을 떠다니면서도, 제주도에서 보았던 문섬 새끼섬의 알록달록한 산호 절벽이 생각났다.

전문 마사지사를 불러 전신 마사지를 받는 호사도 누렸다.


얼마 전까지 필리핀에 돈을 벌러 온 외국인 노동자였는데, 하루 만에 부유한 관광객이 되어 있었다.

낮은 물가 덕에 민박집 숙박요금 정도로 이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미래의 고민은 미뤄둔 채, 휴양지에서의 10여 일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한가로이 휴양지에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마닐라를 들렸을 때는 그 혼잡함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매연을 품어대는 지프니와 자동차, 시카드가 뒤섞여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도심의 한 복판 숙소를 잡고 도시 탐방에 나섰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총을 든 경비원이 지키고 서 있다.

문 안쪽은 부촌 아파트가 즐비하고, 문 밖에는 거지들이 누워있다.

문 안쪽 대형 쇼핑센터에는 한국에서도 볼 수 없던 명품 브랜드가 들어차 있고, 문 밖에서는 10원짜리 자판이 펼쳐진다. 오토바이와 택시, 오래된 군용 버스와 신식 차량들이 뒤엉킨 혼잡한 도로 위로 고가의 외제차가 지나간다. 극명하게 나뉜 빈부의 격차가 같은 시공간에 존재하며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사람들은 그 안에서 나름의 공존을 하며 각자 적응해서 살아가는 듯했다.


화려한 쇼핑센터 앞 대형 크리스마스트리와 쇼핑을 나온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연말이 다가왔음을 깨달았다. 따뜻한 날씨 덕에 반팔 차림이라 연말이 된 것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버라이어티 했던 2012년이 끝나가고 있었다.

이전 05화 05. 제주도에도 겨울은 온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