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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핌 Feb 18. 2022

05. 제주도에도 겨울은 온다.

10년간의 제주 이주의 여정, 2012년 그 시작

겨울 준비


제주도의 동쪽 중산간 마을

가을이 사라지기라도 한 듯 갑자기 밤공기가 서늘해졌다.

따뜻한 남쪽나라라고 불리는 제주도에도 매서운 찬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땅을 구입할 당시 계획은 이러했다.

제주도의 전형적인 돌담과 나무가 우거진 중산간의 아름다운 숲 속, 입구로 들어서면 계절별로 꽃들이 피어나고, 작은 정원을 지나 비닐하우스로 들어서면, 형형색색 아름답게 꾸며진 파티장. 

그 옆에 작은 셰어 하우스를 운영하며, 늦은 밤 갈 곳 없던 여행객들이 놀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일련의 사건들로 집을 짓는 것을 포기하고 모든 계획을 보류한 뒤 한여름밤의 꿈처럼 제주도의 여름을 즐기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임시 거처로 비닐하우스에서 지낸 지 벌써 한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나와 D 둘 다 당장 서울 집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이후 대책이 필요했다.

일단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서 하나씩 직접 만들어 가기로 의견을 모았다.


먼저, 읍사무소에 찾아가 조언을 구하고 건축 담당자에게 농막 설치에 관한 정보를 얻었다.

주택보다는 농막 신고가 쉽고 간단했다. 소 자본으로 지을 수 있는 컨테이너 주택에 대한 정보를 검색하고, 일단 농막으로 설치 후 조금의 자금이 모이면 컨테이너를 요건에 맞게 수리하여 주택으로 신고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갔다. 

읍사무소와 시청 민원실을 열심히 뛰어다니며 세금을 내고 서류를 작성한 끝에 3*9짜리 농막용 컨테이너를 들여왔다. 지번 주소만 있던 토지에 어엿한 도로명 주소가 부여되어 주소 표지를 받을 수 있었다.


주소 표지를 받은 것은 여러 의미로 기념할 만한 일이었다.

그전까지는 토지만 있어 주소이전이 불가능했었다. 부여된 주소로 주소이전이 가능해졌기 때문에 읍사무소에서 주소이전 신청을 하고 진정한 의미의 제주도민이 되었다.



현장 21. 그들은 왜 제주로 가는가


컨테이너 설치를 끝내고, 비닐하우스에 있던 짐을 옮겨놓은지 며칠 안돼, 인터넷 기자를 한다는 D의 지인에게 서 인터뷰 요청이 왔다. 간단한 문답일 거라 생각하고 별 고민 없이 승낙을 했다.

그날 저녁 SBS의 카메라가 우리를 향해 있었다.


상황은 이러했다. 당시에는 제주도에 이주하는 사람들이 특이하고 신기해 보이던 때이다. SBS의 시사프로그램에서 그 주제를 다루기 위해 제주도에 내려왔고, SBS의 담당자와 친분이 있었던 D의 지인이 우리를 소개해 준 것이었다. 중간 이야기는 전달 과정에서 모두 생략되었고, 문답일 거라 생각하고 승낙한 인터뷰가 카메라 앞에서 시작되었다.

짐을 옮긴 지 얼마 안돼 어수선한 컨테이너 안, 막 씻고 나와 풀어헤친 머리, 춥다며 담요를 두른 D의 모습은 보는 이들에게 안타까워 보이기 딱 좋은 몰골이었다.


잘 다니던 직장과 문명의 혜택을 벗어나 제주도까지 와서 왜 사서 고생을 하는지 우리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바라보던 기자의 눈빛, 끝으로 이런 질문을 했다. '그만 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가치가 있어서 온 것이 아니라, 내가 있는 곳에서 원하는 가치를 만들어 가면 된다'라고 당당히 말했던 것 같다.


방송이 나간 뒤 지인들의 걱정이 끊이지 않았다. 

식료품과 담요를 보내주는 친구도 있었다.

그 시절 진심으로 걱정을 해 준 친구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전한다.




새콤한 귤향기


말은 그럴싸하게 했지만, 세심한 계획 없이 덜컥 땅만 사버린 우리들은 다시 돈을 벌어야만 했다.

다음 스텝으로 넘어가기 위한 최소한의 자금이 필요했다.


하지만, 번아웃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해서였을까, 다시 도심 속 직장생활은 하고 싶진 않았다.

회사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먹고살기 위한 방편을 찾아야만 했다.

그렇게, 제주도의 삶 속으로 한걸음 더 들어갔다. 


겨울 제주의 가장 큰 일거리는 역시 귤 따기였다.

아침 6시 반장 아주머니의 트럭에 실려 귤밭에 도착하면 바로 귤 따기가 시작된다. 한참을 귤을 따고 있으면 8시쯤 아침식사를 알려온다. 식사 후 다시 귤을 따다 보면 어느새 점심시간, 점심을 먹고 또 귤을 따고 있으면 3시쯤 참을 내어 준다. 참을 먹고 5시쯤 일을 마치면 현장에서 일당을 나눠주고 다시 트럭에 실려 집으로 돌아온다. 아무것도 생각할 필요 없는 단순함 그 자체였다.


처음에는 못 알아듣던 제주어 사투리도 하나씩 귀에 익어가고, 딸깍딸깍 귤 가위도 손에 익어 간다.

비릿한 멜젓의 맛을 알아가고, 까마귀가 쪼아놓은 귤이 가장 맛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매일매일 바뀌는 제주의 하늘이, 끝 모를 짙푸른 바다 빛깔이, 등을 떠미는 제주의 바람이, 여유롭게 풀을 뜯는 소들이, 아는 채 다가오는 말들이, 요란하게 지저귀는 새들이, 제주의 모든 것들이 말을 걸어오며 비어있던 나를 하나씩 채워 주었다.



다시 백수로


귤 수확이 끝나고 이웃 아저씨가 다니는 벌목 현장에 따라다니게 되었다.

전기톱을 다루는 나무꾼들이 둘셋씩 한조가 되어 자재로 사용하게 될 나무를 자르는 일이었는데, 내가 하는 일은 긴 막대기를 들고 따라다니며 적당한 길이로 자를 수 있도록 자를 대주는 일이었다. 그 외 여러 잡다한 것들을 옆에서 챙겨 주면 되었다.

제주도의 산 깊은 곳, 허가를 받아 나무 하나하나 수량을 파악하고 베어도 되는 나무와 안 되는 나무를 확인하고 작업을 했다. 거대한 나무 아래 전기톱날이 윙 요란한 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나무가 넘어지는 방향을 요리조리 피해 가며 자를 들고 부지런히 움직였다. 나무가 쓰러지면 내 키만 한 막대기를 들고 두자짜리는 두 번, 세자 짜리는 세 번을 재어 적당한 길이로 토막을 낼 수 있도록 짚어 주었다. 기름 엔진으로 돌아가는 전기톱의 특성상 연속해서 돌릴 수 없어 중간중간 휴식시간이 많은 편이었는데 그때마다 여기저기 숲 속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일반인은 들어갈 수 없는 제주도의 깊은 산속을 다니면서 멀리 풀을 뜯는 노루 가족을 만나고, 푸드덕 날갯짓을 하는 꿩을 만나고, 이름 모를 야생의 버섯과 열매들을 발견하며 제주의 자연 속으로 녹아들었다.


하지만, 이일 역시 지속적인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다시 백수가 되었다.


번아웃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빈둥대던 백수 시절과 장소만 바뀌었을 뿐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저 장소가 제주도이며 내 명의의 제주도 땅이 있다는 것 말고는 목적 없이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나는 또 다른 탈출구를 찾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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