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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핌 Feb 22. 2022

07. 멀어지는 제주도의 환상

10년간의 제주 이주의 여정, 잠시 멈춤

집으로


마닐라 공항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 올랐다.

그제야 미뤄 두었던 고민들이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손에 쥔걸 다 내려놓고, 제주도에 덩그러니 땅 하나를 쥐었다.

집을 지으려던 계획은 수포가 되었고, 필요한 자금을 모으기 위한 일자리는 찾기 어려웠다.

다시 제주도에 가서 무엇부터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오랜만에 마중 나온 엄마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감정이 울컥 치밀었다.

오랜만에 보는 엄마는 살이 쭉 빠져 있었고, 얼굴은 10년쯤 늙어 보였다.

일 년간 밖으로만 돌아다니던 막내딸이 귀국해서 일까, 아니면 다른 일이 있어서일까?

울먹이는 엄마의 모습에 심상치 않은 일이 있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나는 2012년 한 해 동안 집안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아니, 신경을 쓰려하지 않았다.

회사를 그만두고 해외로 제주로 홀로 여행을 다녔고, 제주도에 땅을 산 뒤 필리핀으로 떠났다.

나에게 닥친 급격한 변화를 겪어 내느라 주변의 일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 사이 가족에게는 언니의 이혼이라는 큰 사건이 있었던 것이다.


연애 10년 결혼 10년, 8살과 두 살 아들 둘, 이 시점에 이혼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소식이었다.

형부는 명확하지 않은 이유로 이혼을 요청해 왔고 알 수 없는 이유와 원인을 본인 탓으로 돌리던 언니는 옆에서 보기에 위태로워 보였다. 어떻게든 상황을 좋은 쪽으로 돌려보고자 동분서주했을 엄마도 털어놓을 곳 없는 답답함에 힘들어 보였다.


내 걱정을 할 때가 아니었다. 제주도로 가는 것을 미루고 집에 있으면서 나만이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기로 했다.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 대화를 나누는 일, 괜찮다고 말해 주는일.

늦은 밤 잠 못 자는 엄마의 말동무가 되어주고, 가끔 집에 들르는 언니와 몇 시간씩 수다를 떨었다. 당시 언니는 자존감이 바닥에 떨어져 있던 상태로, 20년 세월이 부정당했다는 상실감과 모든 것이 본인 잘못이라는 알 수 없는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는 끊임없이 언니는 그 존재만으로 사랑받는 사람이며 언니의 잘못이 아니라고, 이혼은 끝이 아니라고 계속해서 말해 주었다.

얼마 뒤 상황이 정리되고 언니는 애들 둘을 데리고 친정집 옆 동의 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엄마도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고 안정을 찾아갔다.


그 사이 나는 다시 집에 눌러앉은 채 평범한 직장인이 되었다.



평범한 직장인


다시 직장인이 된다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일 년을 돌고 돌아 다시 회색 건물 속 컴퓨터 앞으로 나를 데려다 놓았다.


뚜렷한 계획 없이 덜컥 땅만 사버린 이후의 현실은 물리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가족을 핑계로 한발 물러설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마음 깊은 곳 도시 탈출을 꿈꾸며 다시 제주도로 돌아갈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전의 직장생활이 나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 워커홀릭의 상태였다면, 이후의 나는 완전히 달랐다.

회사는 그저 돈벌이 수단, 급여를 받는 만큼의 일에만 충실히 하면 되는 것.

회사와 나의 이해관계가 맞지 않는다면, Bye를 외치면 될 뿐이다.

그렇게 조금의 무게감과 스트레스를 내려놓고 도심의 쳇바퀴 속을 무심히 달릴 수 있게 되었다.


내가 혼란을 거듭하며 다시 집으로 돌아갔을 당시, 제주도에 남아 있었던 D는 자신만의 길을 가고 있었다.

땅 바로 옆 제주도 구옥을 빌려 집을 꾸미고, 직장을 구해 일을 하면서, 남자 친구를 만나 연애도 하고 있었다. 함께 제주에 왔었지만 이제는 자신이 속한 곳에서 각자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2013년 어느 겨울 SBS 현장 21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1년 전 촬영의 후속 편으로, 제주도에 살다가 다시 떠나게 된 경위를 인터뷰하고 싶다고 하였다. 나는 씁쓸한 기분이 되어 몇 마디 간단한 인터뷰를 하였다.

제주도에 있던 D의 모습도 촬영을 하였는데, 제주도의 집값 폭등을 이주민들의 잘못으로 거론하며, 사회의 문제덩어리가 된 듯 방영된 이날의 방송에 비난의 댓글이 달렸고, 친구는 참지 못해 방영금지 신청을 넣었다.


아름다운 정원 그림 같은 집에 오손도손 가족들의 따뜻한 모습과 경제적으로 풍족한 삶이 제주 이주의 성공 사례이며, 서울의 문명을 버린 채 시골집에서 불편함을 감수하며 홀로 지내는 촌부의 모습은 실패한 사례라는 그들의 논리는, 어떻게든 꿈을 좇아 노력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까지 비난의 화살이 돌아가게 하였고, 이주민에게는 쓸데없이 방송에 나와 욕을 먹인다며, 제주 원주민에게는 너희들 때문에 집값이 라 살기 힘들어졌다며, 이름 모를 대중에겐 쓸데없이 허황 대게 제주도에 가서 사냐며 이유 없는 욕을 먹어야만 했다.


그렇게 마음에 상처를 입고 제주도와 잠시 멀어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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