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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핌 Feb 23. 2022

08. 다시, 나를 태우는 서울 살이

10년간의 제주 이주의 여정, 잠시 멈춤

도심의 생존법


제주 살기의 무모했던 도전을 잠시 멈추고, 서울에서 다시 직장생활을 시작한 지 한참이 흘렀다.

새로울 것도 즐거울 것도 없는 평범한 일상이 이어졌다.

무기력하게 출퇴근을 반복하며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친구의 결혼식 소식을 듣고 입고 갈 정장을 챙기다가 거울 속 내 모습을 보자 한숨이 흘러나왔다. 10kg나 불어 거대해진 몸집을 하곤 불만 가득한 눈빛으로 거울 속 낮선이 가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저 돈을 벌기 위해 억지로 출퇴근을 해야 하는 도망갈 수 없는 현실의 도피처는 방구석 군것질이었다. 지금 일을 하는 것은 다시 제주도를 가기 위함이니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며, 스스로 아싸(아웃사이더)가 되어 사람들도 만나지 않고 집에 틀어 박혀 밤마다 홀로 과자와 맥주로 마음속 허전함을 달랜 결과였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것일까.

제주도에 가기 이전의 나는 매일을 넘치듯 살아왔었다.

일주일에 두 번씩 가는 살사 수업

일주일에 세 번 이상 만나는 동호회 사람들

한 달에 서너 번의 동창 모임

밤마다 이어지는 술자리, 올라잇 살사 바 투어

주말에는 스쿠버 다이빙을 배우고,

휴가를 내어 필리핀으로, 팔라우로 다이빙 여행을 떠났다.

일주일 동안 하루를 온전히 쉬는 날 없이 달리고 또 달렸다.

일을 하면서 받게 되는 스트레스와 중압감을 날리기 위해서였을까?

그 결과 번아웃에 도심을 떠나 제주도로 향했었는데,

지금의 나는 출퇴근 이외에 그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았다.


마음을 잡고 치열한 도심 속 삶의 한가운데로 다시 나를 불러 세웠다.

당장 제주도로 떠날 것이 아니라면! 다시 서울 살이에 적응하는 수밖에 없다며 나를 다그치고, 환상 속의 제주도를 마음속에서 비워냈다. 


화려한 도심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는 다시 불을 지폈다.



다이어트


도심 속 사람으로 섞이기 위한 첫 스탭은 다이어트였다.

이리저리 돌려 말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시각정보로 사람을 판단한다.

관리되지 않은 모습으로 사람들을 마주하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처절한 다이어트가 시작되었다.


소금을 뺀 삶은 달걀과, 소스 없는 양배추 샐러드를 먹으며 옷걸이로 방치되던 실내 자전거를 다시 꺼내 달리기 시작했다. 엄마는 다 큰 딸을 위해 아침마다 저염식 도시락을 싸 주셨다. 퍽퍽한 달걀과 종이장 같던 양배추가 점점 익숙해지며 달걀의 고소함이, 양배추의 달콤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과자가 먹고 싶으면 아몬드를 아작아작 씹어먹고 배가 고프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설탕과 소금을 뺀 자극 없는 식단을 먹으며,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에 신경이 곤두설 때면 청양고추를 씹어 댔다. 매운 고추를 아삭아삭 씹어 먹으며, 가장 극한의 자극으로 달콤함의 유혹을 뿌리쳤다.

기운이 없다 투정을 부릴 때면 엄마는 소고기와 양파 피망으로 나를 위한 저녁 반찬을 따로 준비해 주셨다. 당시 언니와 조카들을 돌보며 아빠와 나까지 챙겼으니 얼마나 손이 많이 갔을까 생각하니 절로 미안해진다.


엄마의 수고로움과 나의 피나는 노력으로 점점 예전의 몸을 찾아갔고, 3개월 전 숨쉬기조차 힘들었던 정장 치마를 가볍게 입고 무사히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

서울의 중심 아름다운 꽃들로 화려하게 장식된 결혼식장에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제주도는 어쩌고 왔냐며 저마다 나의 근황을 물어 왔다. 친구들의 환상이 깨지지 않도록 선택적 사실과 그럴싸한 말들로 적당히 둘러 댔다. 친구들은 '제주도에 땅을 가진 여자'라며 치켜세워 줬지만, 마음 한 구석은 여전히 시려 왔다.



구로디지털단지


새로 입사한 회사는 구로디지털단지에 있었다.

버스와 전철에 시달리며 1시간 반의 여정 끝에 구로디지털단지역에 도착하면, 전철은 그야말로 사람들을 토해낸다. 어디서 그 많은 사람들이 다 나올 수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끝도 없이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도로를 가득 메웠다. 전철에서 도보로 10여분, 사람들의 강을 따라 걷다 보면 다들 제자리를 찾아 건물 사이로 빠르게 사라져 버렸다. 나도 내가 속한 회색의 높은 건물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당연한 듯 출근길에 커피를 사고,

아침이면 나타났다 사라지는 김밥을 사고,

소문난 구내식당을 찾아 건물마다 순회를 하고,

후식으로 팀원들의 밀크티를 사주고,

회의를 위해 카페에 모여 디저트를 먹고,

사다리 타기 간식으로 떡볶이를 사 먹고,

야근을 할 때면 햄버거 세트를 사람 수대로 주문을 하고,

술 한잔 생각날 때는 팀원들과 호프집에 들렀다.

손길 눈길 닿는 모든 곳이 달콤한 유혹으로 가득한 세상.


5분마다 요란한 소리를 내는 전철은 서울 어디든 뻗어 있다.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는 야간에도 운행을 한다.

길가다 손을 뻗으면 어디서든 택시를 잡을 수 있다.

무선 인터넷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연결되어 있다.

건물 하나 건너 하나씩 편의점이 있고, 

다양한 종류의 패스트푸드는 종류별로 고를 수 있으며,

각종 프랜차이즈는 선택 장애를 일으킬 지경이다.

돈만 지불하면 모든 것이 가능한 내가 살고 있는 회색 도시였다.


이것들을 누리기 위해 나는 일을 하고 돈을 벌었다.



그리움


숲이 우거진 마을 안 새들이 지저귀는 정원 속 농막 한채, 얼마 전까지 내가 머물던 곳이었다.


핸드폰의 알람이 아닌 새들의 우렁찬 울음으로 아침을 시작하고, 문을 열고 나가면 초록의 나무들이 뿜어내는 상쾌한 공기가 얼굴을 스친다. 느릿느릿 원두를 갈아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내려 마시며 잠시 마당에 앉아 사색을 즐겼다.


사람을 만날 일이 없으니 화장은 패스 차가운 냉수로 세수를 한다. 할 일없이 마을 어귀를 산책하다 예쁜 꽃이라도 발견한 날이면 신이 나 요리조리 사진도 찍어 보고 꽃 이름이 뭘까 검색기를 돌려본다. 넓은 들판 위 언제 데려다 두었는지 열심히 풀을 뜯는 말에게 괜스레 말을 걸어 보고, 친한 척 꼬리를 흔들며 다가오는 주인 없는 강아지와 놀아 주기도 했다.


옆집 할망이 돌담 넘어 건네준 씨앗을 무작정 심어보며, 알아듣지 못하는 제주어를 들어보려 귀를 쫑긋 세운다. 때가 되면 알아서 올라오는 새싹들이 신기해 애지중지 돌보다가 할망의 잔소리에 뽑혀 나가는 아이들을 보며, 아! 잡초 뽑으라는 소리였구나, 너무 빽빽하니 속아주라는 거구나, 하며 뒤늦게 깨닫는다. 텃밭은 처음이라 흙을 파고 돌을 나르는 게 어설펐어도 하나씩 내 손으로 키워내는 게 재밌기만 했다. 


비록 하루에 4대 정도 다니는 버스지만, 시간을 맞춰 버스에 오르면 아름다운 해변으로 나를 데려다주었고, 에메랄드 빛 바다에 파란 하늘이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나는 해변은 감탄을 자아냈다. 해변을 텀벙거리며  걷다가 조개를 줍고 보말을 따며 다음 버스 시간까지 한가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집 주변에 편의점은커녕 마트 하나 없었지만, 스쿠터로 10분을 달려 동네 할망의 작은 마트를 방문할 때면 멀리 바다가 보이고 오름이 보이는 멋진 풍경을 볼 수 있었고, 바람에 실려오는 귤향기에 미소 지을 수 있었다. 몇 가지 갖춰져 있지 않는 소박한 가게 문을 열어두곤, 어디에 가셨는지 알 수 없는 주인 할망을 한참이나 기다려 원하는 물건을 득템 할 때면 횡재를 한 기분이었다. 

배달 음식은 없었지만 집 앞 손수 만든 화덕 속 고기가 구워지고, 난생처음 만들어 보는 음식들에 요리사의 자질이 샘솟는 듯했다. 


제주의 밤은 칠흑같이 어두웠으며, 그 덕에 반짝이는 밤하늘의 별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었다. 어느 계절에는 문 앞에서 반짝이는 반딧불을 목격할 수도 있었다. 찌륵찌륵 개굴개굴 밤의 오케스트라가 펼쳐진다.


외부와 적당히 단절된 곳

자연과 맞추어 느리게 가는 시간

누군가는 불편하다 할 수 있겠지만, 나에게는 행복을 주던 그곳.

점점 그곳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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