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간의 제주 이주의 여정, 잠시 멈춤
새로운 나의 명함에는 온라인영업팀 팀장이라고 적혀있었다.
의상학과를 졸업하고 웹디자이너로 일을 하다가 경영기획팀, 온라인사업부를 거쳐 이제는 영업팀 이라니.
(2014년도의 일이다.)
디자이너로 불리고 싶었지만 디자이너가 되지 못한 쇼핑몰 MD
대기업이 아닌 작은 회사의 MD는 그냥 '다' 한다고 보면 된다.
홈페이지를 기획하고 디자인하고 제작을 했다.
웹기획자, 웹디자이너, 웹퍼블리셔, 웹마스터가 필요하지 않냐고?
그냥 혼자 다 하면 된다.
상품을 기획하고 온라인을 통해 판매를 했다.
일단 상품을 던져주면 이름을 짓고 콘셉트를 정해 사진을 찍는다. 그 사진으로 상세페이지를 만들고 쇼핑몰에 상품을 등록한다. 상품 재고를 파악하고 오픈마켓, 종합몰, 소셜커머스 중 특징에 맞는 쇼핑몰을 골라 MD와 미팅을 하고 팝업을 올린다. 홍보 배너를 만들고, 기획전 카피를 쓰고, 법리적 문제는 없는지 검토한다.
상품이 필요하면 해외로 소싱을 가고, 재고가 쌓여있는 창고를 뒤져 보물 찾기를 하여 창고를 비워낸다.
제작이 필요한 상품의 생산 계획을 짜고 입고 스케줄에 맞춰 기획전을 준비한다. 계획된 일정이 지연될 때면 전화통을 붙잡고 재촉을 해야 했다.
패키지가 없으면 패키지를 디자인하여 제작을 하고, 택배박스를 발주한다.
때로는 고객의 상담전화를 받았다. 일단 나에게 넘어왔으면 악성 클레임 일 것이니 심장을 부여잡고 차근차근 풀어내 본다. 잘 못 한 거 없이 욕을 한 바가지 먹어도 한숨 돌리고 다시 책상에 앉아야 했다.
일 손이 부족하면 포장도 함께 하고 택배 송장도 뽑고, 우체국을 방문하여 등기를 보냈다.
월 마감일이 다가오면 정산내역을 살피고, 수수료를 확인하고, 누락된 계산서가 없는지 체크했다.
그나마, 일 잘하는 두 팀원이 손발이 되어 주었다. 하지만 '팀장'이라는 직함을 단 이상, 직원과 회사의 의견을 조율하고 그들을 이끌어 주는 것도 또한 내 몫이었다.
대표의 뜻에 따라 철 지난 신발이며 인형 등 잡동사니가 가득 쌓여 있던 창고를 비워 현금화시켰지만, 창고를 비우는 속도만큼 또 다른 상품들로 창고는 쌓여갔다.
숨이 막혀 온다.
회색 건물 속 개미가 되어 간다.
아무런 의미 없이 챗바퀴를 돌려댄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지만, 뛰어내릴 수가 없다.
버스와 전철에 시달리며 1시간 반 이상 걸리는 구로디지털단지로의 출퇴근을 감내하던 시간, 같은 시간이면 비행기로 제주도에 갈 수 있었다. 고작 1년인데 향수병 마냥 그리움이 커져갔다.
회색의 도심 속 일개미로 사라져 버리기 전에 다시 힘을 내 보기로 했다.
제주도에 다시 돌아가기 위한 장기 플렌을 세우며, 일 하는 것에 목적을 부여했다.
그리고, 이러한 의지를 잊지 않기 위해, 내가 제주도민임을 깨닫기 위해,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제주도에 다녀오기로 스스로에게 다짐을 했다.
오랜만에 방문한 제주도는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내 집에 왔다는 기분보다는 여행객의 느낌이었다.
자연과 하나 되어 장화를 신고 뛰어다니던 나의 모습도 하이힐을 신은 육지 이방인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여행객이 아닌 제주 도민이 되기 위해 부지런히 비행기에 올랐다.
제주 공항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고 익숙한 공기가 코끝을 스친다.
마을 어귀 집으로 가는 길 상쾌한 풀향기에 크게 숨을 들여 마셨다.
한 시간 반의 출퇴근 시간보다, 한 시간여의 비행시간이 훨씬 즐거웠던 시절,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서울의 바쁜 일상을 피해 제주도에 갈 때면, 역시 '집이 최고야'를 외칠 수 있었다.
집은 30여 년 간 부모님과 함께 살던 곳뿐이었는데, 나의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또 다른 공간이 생긴 것이다.
물론 공동명의여서 100% 나만의 것이라고 할 순 없었지만.
공동명의로 함께 땅을 구입했던 친구 D는 제주도를 떠나지 않고 바로 옆 오래된 구옥에서 연세로 살고 있었다. D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동네 사람들과 아주 잘 어울려 지내는 듯했다.
어느 날은 텃밭을 가꾸기로 했다며, 동네 사람들을 불러다가 마당 한가운데에서 밭을 일구고 있었다. D는 어설프게 흙을 파던 나를 국수를 삶으라며 부엌으로 내 몰았다. 만들어 본 적 없는 국수를, 그것도 10인분이나 어떻게 삶아야 할지 난감해하며 휴대폰으로 레시피를 뒤적거려 일단 한솥 가득 멸치를 넣고 삶았다. 육수의 느낌은 없고 그저 맹물이라 어찌할 바를 몰라 동동 거리던 차에 사람들이 돌아왔다. 국수를 삶는다던 사람이 한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자 상태를 살피러 온 것이었다. 사람들의 도움으로 어찌어찌 완성을 하여 국수를 먹을 수 있었다.
마을에는 초등학교 또래의 아이들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과 소풍을 간다며 나를 끌고 나서기도 했다. 돗자리를 피고 도시락을 먹고, 바닷가를 뛰어다니며 아이들과 정말 애처럼 노는 모습에 내가 떠나온 시간만큼의 거리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도 나는 제주도에 갈 때마다, 와인이며 양주 등 D가 좋아하지만 제주도에서 잘 살 수 없던 것들을 가지고 갔다. 함께 술잔을 적시고 화목난로에 고구마를 구워 먹고, 손수 만든 치즈를 먹으며 제주의 밤을 만끽했다.
제주도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고, 갈 때마다 나에게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