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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핌 Feb 16. 2022

04. 아름다운 제주도의 여름밤

10년간의 제주 이주의 여정, 2012년 그 시작

집이 필요해


처음 땅을 살 때의 계획은 이러했다.

비밀의 화원 같았던 우거진 정원을 예쁘게 정비하고, 비닐하우스를 커다란 돔으로 꾸며 숲 속의 비밀스러운 파티장으로 만들기 위한 아이디어를 냈다. 옆에는 거주할 수 있는 10여 평의 작은 집을 하나 짓자고도 했다. 

이러한 고민과 계획들은 목사 패거리가 나무를 파가는 순간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집을 짓는 것 역시 땅을 소개해 준 K에게 맡기려 했었지만 일련의 사건들로 더 이상 믿을 수가 없었다.

K는 본인이 살고 있는 집도 직접 지었다 자랑을 하며, 10여 평의 작은 집 하나쯤 일도 아니라고 하였다. 건설업자를 알아볼 필요도 없이 자신에게 맡기면 2천만 원이면 된다고 하였다. 

집을 짓기 위해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예산을 짜보며 K의 말이 얼마나 터무니없었는지 알게 되었다. 10년 전이라 해도 집을 짓기 위해선 아무리 적게 잡아도 평당 300~400만 원은 필요했다. 그뿐 아니라 집을 짓기 위한 설계도면을 작성하고 지목을 변경하고 건축허가를 받는 등 서류 작업에 들어가는 세금만 해도 천만 원은 족히 필요했다. 토지 매매에 대분분의 예산을 써버린 우리가 건축을 망설이자 부모님에게 손을 벌리라 부추기는 K였다. 더 이상 상종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판단을 하였다.


결국 고민 끝에 우리는 집을 짓는 것을 포함 모든 계획을 전면 보류하기로 결정했다.


그렇다고 제주도에 이주를 하겠다며 다 정리를 하고 내려왔는데, 이대로 포기하고 서울로 올라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여기저기 거주지를 옮기며, 임대를 위해 집을 알아보다가 비닐하우스에서 지내기로 결심을 했다.  지금처럼 한 달 살기, 일 년 살기 같은 개념조차 없던 시절, 임시 거처를 알아보기란 쉽지 않았고 예산도 문제였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땅이 있지 않은가! 우리가 가진 것을 최대한 활용해 보기로 했다.


비닐하우스는 대략 10여 평 남짓

하우스 바닥 한쪽을 벽돌로 깔고 방수원단을 구입해 대형 막사를 치듯 박스 모양으로 고정을 하였다. 그 안에 텐트를 설치하여 개인 공간을 만들고 침실로 꾸몄다. 다른 한쪽은 배수가 잘 되도록 바닥을 파고 돌을 넣은 후 수도를 연결하여 세면대를 만들었다. 공간이 만들어지자 D는 제주에 오기 전 원룸을 빼고 이삿짐센터에 맡겨놨던 이삿짐을 가지고 왔고 비닐하우스 천막집에 가구와 집기가 채워졌다.

내 짐이라고 해봐야 옷 가지 등 작은 케리어 하나가 전부였다.


이렇게 임시 거처가 완성되고 제주도에서의 비닐하우스 살이가 시작되었다.





일상이 캠핑


중산간에 위치한 우리 마을에는 새들이 참 많았다. 

새들의 지저귐으로 아침을 시작하면서 처음에는 구분이 되지 않던 새들의 소리가 저마다 다르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특히 까마귀가 많았는데 산 까마귀라 그런지 도시에서 보는 새들보다 훨씬 크고 깃털에도 윤기가 흘렀다. 너무 시끄럽게 울어 훠이 쫓으려 할 때면 사람 말을 알아듣는 듯 깍! 하고 대꾸를 하기도 했다.

마당에 앉아 새소리를 들으며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내려 모닝커피를 마실 때면 서울을 떠나 왔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넓은 마당 한쪽에는 화덕을 하나 설치해 두었는데, '삼시세끼'와 같은 요즘 예능에 나옴직한 벽돌 화덕이었다. 화덕 위로는 커다란 솥을 걸어 백숙을 삶고 불판을 올려 고기를 구워 먹었다. 제주 뒷고기라며 식당에서 팔리는 비싼 고기가 아니라, 정육점에서 받아오는 비 정형화된 진정한 의미의 자투리 뒷고기는 조각조각 다른 맛을 가지고 있어 별미였다. 


바로 옆집은 귤나무가 가득한 제주 옛 가옥이었는데 돌담으로 이어진 예쁜 올레를 지나면 폭신한 잔디와 안거리, 밖거리, 귤 창고가 나오는 전통적인 모습이었다. 지금의 올레길은 둘레길의 의미처럼 넓게 쓰이지만, 원래 올레는 통상 큰길에서 집의 대문까지 이어지는 좁은 길을 뜻하는 제주 방언이다. 원래의 의미대로 큰길부터 대문으로 이어지는 할망집의 올레는 정말 아름다웠다.


마을 안으로 이어진 골목길에는 삼나무가 우거져 있었고, 여기저기 귤밭에는 수령이 오래된 듯한 커다란 귤나무가 커가고 있었는데 그 높이가 내기를 훌쩍 넘어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열매가 맺혀 있었다. 수령이 어린 나무의 과실이 맛이 좋아 귤나무가 너무 크면 베어내고 새로 심는다고 하는데, 마을 안 귤밭은 생업과는 상관없는 듯 제 멋대로 뻗은 가지에 커다란 귤들이 익어가고 있었다. 오히려 그런 나무의 생김생김이 자연스럽고 멋스러워 한참을 바라보게 되었다.


아직은 귤나무에 파란 열매들로 가득한 어느 여름날, 제주에 와서 알게 된 언니의 친정 귤밭에서 귤 속는 작업을 도와주기로 했다. 귤나무에 열매가 너무 많이 열리면 노랗게 익어가는 과정에서 자리를 못 잡고 서로 붙어 상품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적당히 속아 주어야 더 맛있고 달콤한 귤이 열린다고 하였다. 일정 크기의 똘똘한 열매를 남기고 너무 작거나 큰 파치들을 속아냈더니 꽤 많은 양이 나왔다. 호기심에 하나를 까서 먹어보니 새콤함에 눈물이 찔끔 났다. 레몬보다 몇 배는 더 신 것 같았다. 그냥 버리기는 너무 아까워 집으로 가져와 풋귤 청을 담갔다. 지금은 풋귤로 정식 명칭이 정해지고, 법적으로 풋귤을 판매할 수 있는 시기가 정해져 있지만, 10년 전만 해도 청귤, 햇귤, 파치 등으로 재각각 불리며 겨울의 과실을 위해 속아내고 버려졌었다. 나처럼 아까워하는 이들이 하나둘 청을 담그고 팔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풋귤을 찾는 사람들도 꽤 많아진 것 같다.


차로 10여분 거리에는 함덕해수욕장이 있었는데, 지금처럼 관광지로 유명해 지기 전이라 한적하고 아름다운 해변이었다. 함덕에서부터 조천까지 이어지는 해안가 어디에서든 바위 위에는 보말이 지천이었고 바위틈마다 갱이(돌개)들이 쏙쏙 숨어 있었다. 바구니를 들고 나와 하나 둘 큼직한 보말을 골라 바구니에 담고, 갱이를 잡았다. 물이 빠지고 난 뒤 조개 역시 쉽게 잡을 수 있었는데 앉은자리에서 이리저리 모래를 파서 조개를 줍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잡아온 보말로는 보말 밥을 지어먹고, 갱이는 바삭하게 튀겨 먹고, 조개는 봉골레 파스타의 재료가 되었다. 

처음 해보는 낚시에 서툰 채비를 하고 있으면 옆에서 낚시를 하시던 동네 어르신이 다가와 무심한 듯 이것저것 알려주며, 때로는 큼직한 생선 한 마리 나눠주고 가셨다. 직접 작은 조그마한 생선 몇 마리를 구워 먹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다. 

이제는 인기 해수욕장이 되어버린 함덕은 많은 사람들이 찾으며 개발이 되어 화려한 불빛으로 빛나고 있지만, 보말이나 조개, 갱이는 더 이상 찾기 힘들어졌다. 정비를 위해 가져다 부은 모래 탓인지 조개는 보이지 않고, 너무 어린 보말까지 관광객들이 모두 잡아가서 인지 커다란 보말을 보기 힘들어졌으며, 갱이를 잡던 바위는 카약과 잠수정을 타는 정착장이 되었다. 

그래도 바다 색만큼은 여전히 아름다운 함덕해수욕장을 나는 여전히 사랑한다.


D는 스쿠터를 하나 장만하였는데, 함께 숲길을 달리다가 마음에 드는 곳에 멈춰 서서 알려지지 않은 제주도의 속 모습을 둘러볼 수 있었다. 갑자기 나오는 넓은 들판에 말들이 풀을 뜯기도 하고, 막 다른 길 울창한 숲에 가로막혀 당황을 하면서도 태곳적 웅장한 모습의 자연에 감탄을 하다가, 돌아서면 나타나는 묘지에 심장을 쓸어내리기도 했다.

우연히 방문한 차 밭에서는 주인 부부가 내어주는 차 한잔을 대접받으며 파릇파릇 찻잎으로 가득한 녹차밭을 구경하기도 하며, 문이 열린 본향당에 살짝 들어가 당나무 아래 소원도 빌어보았다.


겨울 내 꽃 피웠던 동백나무에는 열매가 주렁주렁 달리고, 길 가다 마주치는 말 한 마리, 느긋한 동네 개들, 향긋한 귤나무와 파란 하늘은 어디를 봐도 아름다웠다.





매일이 축체


8월부터 9월까지는 각종 축제와 행사가 이어졌다.

길을 가다 행사 포스터가 보이면 사진을 찍어 놓았다가 찾아 다니 곤 했는데, 지난 사진첩의 포스터로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Jeju Beach Salsa Fastival

IMAGENE AWARDS MUSICFEST 2012

9TH STEPPING STONE FESTIVAL

2012 힐링 제주 뮤직 페스티벌

2012 탐라대전

제5회 제주 해녀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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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도 크고 작은 마을 행사와 해변에서 열리는 축제들로 여름의 제주도는 언제나 떠들썩한 밤이었다.

지금도 매년 참석하는 스테핑스톤 페스티벌은 당시에는 굉장히 작은 규모로 밴드와 관객이 하나 되어 즐기는 소극장 공연과도 같았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인디밴드와 제주출신 밴드들로 라인업이 이루어졌었는데, 해가 갈수록 함덕이 유명해지며 해변 가득 사람들이 들어차고 유명 밴드들이 메인을 서기도 하는 인기 페스티벌이 되었다. 코로나로 2년째 축제가 사라졌지만 여름의 함덕해수욕장은 여전히 사람들로 가득하다.


휴가철을 맞아 연이어 지인들이 찾아왔고, 웃고 떠들며 밤을 지새웠다.

친구들은 제주도에 살게 된 나를 용감하다며 신기하게 여겼지만 정작 나는 그렇게 큰일인가 실감하지 못했다. 사람들의 눈에는 좋은 직장, 든든한 가족, 안정된 집, 편안한 일상 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아무것도 없는 제주도에 살겠다는 내가 특이하게 보였겠지만, 나로서는 지금 제주도에서의 꿈같은 나날들이 즐겁고 행복하기만 했다. 미래가 어떻든, 노후가 어떻든, 결혼이나 직장이나 내일 밥벌이가 어떻게 되든 당시에는 아무 걱정 없이 여름밤의 축제에 취해 즐기고 또 즐겼다.


제주도에서의 나의 삶이 부럽다며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묻는 친구들에게, '손에 쥔걸 다 내려놓으면 새로운 걸 잡을 수 있어'라고 누군가의 말을 인용해 대답해 주었다.


사는 곳은 비닐하우스 텐트였지만, 좀 긴 캠핑을 즐긴다고 생각하면 되었다. 

눈을 뜨면 새들이 지저귀는 매일이 여행이고 축제 같은 날이었다.

안정과는 거리가 먼 불안한 일상이었지만, 자잘한 걱정 따위는 하늘 한번 바라보면 바람에 날아가는 듯했다. 모든 것이 처음이라 새롭고 신기했으며 재미있었다.

아직 30대 초반이었고, 어떻게든 다 잘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축제 같은 제주도의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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