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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린 Jul 31. 2024

[보령] 우리 서해 바다, 월드스타 맞습니다.

열음방학 01

여름 방학이 시작됐다. 매미 울음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하고, 교실에서 호기심 많은 아이들 몇몇이 바닥에 떨어진 매미 허물을 손에 쥐고 다닐 때쯤에 초등학교의 여름방학도 시작된다. 방학식 날, 건강하고 안전하게 방학 잘 보내라고 단도리도 좀 하고, 공부는 조금 하고 많이 놀고 오라고도 하며 방학 전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인사를 하면서도 작은 발들은 꽃게처럼 문 쪽으로 슬금슬금 움직였다. 인사를 마치자마자 와다다 앞문과 뒷문으로 달려 나가며 잔상만 남기는 아이들의 순발력은 가히 대단했다. 흥, 너네만 놀러 가니, 나도 좋은 데 간단다. 나도 방구석에 고이 재어놓은 여행 가방이 있단 말이다. 올여름 방학의 시작은 고등학교 친구들과 대천 앞바다에서 맞이한다.

목적지는 보령 머드 축제다. 어쩌다 여기로 가게 된고 하니 대화에 늦게 참여한 나는 알 수가 없고, 어쩌다가 나온 제안에 좋다 삼세번이 나와서 결정된 모양이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그래서 대천행 무궁화호에 몸을 싣게 되었다. 처음에는 자차를 갖고 내려갈 요량이었으나 생각해 보니 내 의지와 비례하지 않는 운전 실력으로 점차 마음을 바꾸게 되었다. 그리하여 탑승한 무궁화호, 왜 이렇게 추운지 모르겠다. 무궁화호라고 정감 있고 뜨스울 줄만 알았는데 압도적인 냉방으로 어금니만 딱딱 부딪히면서 세 시간 반을 보냈다. 차라리 뛰어 내려서 달려가고 싶다는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올 무렵에 무궁화호 기차는 쇳소리를 내며 대천역에 정차했다. 이미 깜깜한 밤이었다.


택시를 잡아 친구들이 미리 가 있는 숙소로 향했다. 숙소 이름을 모르시길래 도로명 주소를 입력해 가는데 무슨 귀신이 다섯 보에 한 번씩 튀어나올법한 논두렁 길을 운전해 가게 되어 기사 아저씨가 잔뜩 예민해지셨다. 험난한 여정으로 털이 바짝 선 고양이처럼 온 감각이 기민해진 기사 아저씨는 숙소 불빛을 보고서야 조금 누그러지셨다.

"아이, 여기면 대천 기사들은 다 아는 덴디?"

"앗, 정말요?"

"그럼, 여행 오는 사람들 여기 자주 묵어요. 여기 옆에 골프장도 있잖아."

"앗, 저런..."

"네비는 왜 이런 길을 알려줘 갖고, 에잉."

"앗..."

어쨌든 몸 성하게 도착했으니 됐다.


숙소는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뒹굴어도 될 정도로 널찍했다. 모여야 될 사람 8명 중에 금요일 밤에는 5명만 있어 각방을 써도 될 정도였다. 내가 도착했을 때 친구들은 이미 거나하게 먹고 마시고 온 모양이었다. 난 저녁을 먹지 않아 매우 배가 고픈 상태였는데 친구들이 안주로 더 먹어도 되니까 하나만 더 시키자고 했다. 프론트에 전화해 물어보니 대천 앞바다에 있는 음식점은 다 영업배달 중일 거라고 했다.

"혹시 여기 근처에 치킨 집도 있을까요?"

"아, 여기저기 뭐가 있기는 한데 저는 BHC 제일 맛있기는 하더라고요."

프론트 직원의 소중한 의견을 수렴해 우린 BHC 뿌링클 치킨을 먹기로 했다.


치킨을 먹으며 지현이가 타로 집을 열었다. 지현이는 타로를 본다. 지난번에 집들이했을 때 나도 봤는데 영 결과가 좋지 않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어 그 전망을 물어보니 갑자기 9개 칼을 든 누가 봐도 쓰러져가는 용사가 나와 어이가 없었다. 이번에 친구들은 주로 연애운을 물었다. 나도 꼽사리 껴서 다시 봤는데 이번에 용사는 바닥에 쓰러져 땅을 기어 다니고 있었다. 뭔데, 내 카드는 멀쩡하게 서 있는 게 없는 거야.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이 정도면 조작 아니냐고. 지현이가 타로를 봐줄 때마다 난 번번이 운명론을 버리게 된다. 내 인생 내가 개척해 나가는 거 아니겠냐고, 호호. 친구들은 엄숙한 자세로 지현이가 내놓는 타로 카드 해석을 들었는데 지현이의 해석과 친구들의 상황이 찰떡 같이 맞아떨어져 모두 감탄을 금치 못했고 타로 카드를 하나씩 뒤집을 때마다 친구들도 거나하게 뒤집어졌다.


다음 날, 일조량으로 인한 자연기상으로 상쾌하게 아침을 맞이했다. 그래, 인간은 무릇 간사하고도 인위적이며 오만하기 짝이 없는 발명품인 알람 시계보다도 자연스럽게 햇빛을 쬐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뜨끈한 기운으로 눈을 떠야 하는 법이다. 조금 늦긴 했지만 이건 슬로우 라이프를 지향해야 할 현대인의 소양이라고 할 수 있겠다. 느긋하게 준비를 마치고 상화원으로 향했다. 상화원은 죽도에 위치한 정원이데 기다랗게 이어진 나무 데크 길을 따라서 죽도를 한 바퀴 빙 둘러보며 풍경과 경치를 즐길 수 있다. 습도가 높은 날씨에 푹푹 찌기는 했지만 그래서 그런지 젖은 풀내음이 올라왔다. 등골을 타고 흐르는 땀은 쾌적함과는 영 거리가 있었지만 온통 축축해진 덕분에 진득한 흙과 나무 냄새며 풀밭 냄새가 사방에 스며들어 있었다. 푸릇푸릇한 싱그러움을 만끽할 수야 있다면 얼마든지 땀 빼줄 수 있지.

상화원을 둘러보며 땀을 쭉 빼고 나니 기력이 쇠했다. 상화원의 출입구 바로 앞에는 식당이 오목조목 모여있다. 우린 그중 한 곳을 점찍어 들어갔다. 해물 칼국수와 물회를 2인분씩 시켰다. 쫀득한 칼국수 면과 짭조름한 국물 맛을 맛보니 올드보이 최민식처럼 골방에 갇혀 죽을 때까지 이 해물칼국수 한 그릇씩 먹어도 좋겠다 싶었다. 그러다 물회 한 수저 뜨니 앗, 어쩌면 해물칼국수만으로는 일생을 못 날 수도 있겠는데, 하는 마음이 들었다. 다시 칼국수 먹으면 최민식 모드 온. 그렇게 칼국수와 물회가 팽팽한 맛 대결을 벌이며 오전 식사를 마쳤다. 풍만하게 오른 배를 어루만지며 우린 대천 앞바다로 향했다. 또 움직이면 금방 배 꺼진다, 먹고 소화시키고 먹고 소화시키고. 눈에 좋은 거 봤다가 몸에 좋은 거 먹다가. 이게 여름방학의 묘미 아니겠는가.


여기서 축제라는 걸 한다고 들었는데 제대로 찾아온 거 맞나요? 의외로 축제 장소가 한적해 조금 당황했다. 어딜 가든 사람이 바글바글하고 줄을 서야만 하는 수도권 생활에 익숙해진 건지 축제라는 이름을 걸고도 자유롭게 활보가 가능하며 개인 공간을 확보할 수 있음에 놀라움을 먼저 느꼈다. 표를 끊고 들어가서 푸드 트럭의 위치(가장 중요), 샤워 시설과 락커룸, 화장실, 간이 수돗가 등등을 미리 파악해 두었다. 두시 반부터 입장이 가능하다 해서 줄 서서 기다리는데 오며 가며 안전 요원들이 수돗물을 뿌려 주었다. 아이 좋아, 아이 시원해, 줄 선 사람들이 꺄르륵 거리며 물줄기 맞는 걸 보니 새삼 사람들 너무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는 다들 엄숙한 표정 짓고 출퇴근하고 지하철에서 금방이라도 혼절할 것만 같은 표정 짓는 사람들이 이 작은 거 하나에도 이렇게나 깜찍해지다니. 이러니 주 4일제를 시급히 시행해 사람들에게 잃어버린 웃음을 되찾아 주어야 한다 이 말이다.

게이트가 열리고 입장했다. 말끔하게 들어간 그때부터 진흙 애벌레가 되어 다섯 시 반에 나올 때까지 우린 거기 있는 놀이 기구나 레크리에이션을 거의 다 해본 것 같다. 제일 재밌었던 건 아무래도 머드 슬라이드였는데 슬라이드여서 일찍 끝나긴 했지만 슝- 하고 미끄러져 진흙탕에 빠질 때 마치 진흙을 온몸에 바르고 물 웅덩이에 빠지는 한 마리 아기 돼지가 된 기분이 들어 흡족스러웠다. 레크리에이션도 흥미로웠다. 머드장에 들어가 사람들하고 기차놀이를 했는데 우리 팀이 이겨서 진 팀 사람들에게 진흙 세례를 던졌다. 합법적으로 다른 사람을 괴롭힐 수 있어서 내 안의 가학심을 일깨울 수 있었달까. 유진이는 핫걸에게 불려 나가 열심히 춤도 췄다. 머드 비누 같은 거 경품으로 하나 주지, 유진이가 그렇게 열심히 빵댕이를 흔들었는데 말이다. 출발 드림팀처럼 장애물 경기장도 있었다. 유진이랑 커피 내기를 해서 사력을 다해 달렸는데 체력이 급격히 쇠락하는 바람에 마지막 가서는 갯지렁이처럼 기어서 완주하게 되어 비참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더랬다. 커피도 사야 되고, 인간으로서의 긍지도 잃은 순간이었다.


중간에 피자와 감자튀김으로 떨어진 체력을 긴급 수혈하고자 했는데 아무래도 다들 허약인간이어서 그런지 가쁜 숨을 내쉬기만 하고 집 나간 체력은 도저히 돌아올 생각을 않아 보였다. 이렇듯 튼튼 인간은 모르는 허약인간의 세계가 있다. 장기적인 건강과 평온함보다는 현재의 쾌락과 즐거움을 쫓는 것이 바로 허약인간의 생을 꿰뚫는 본질이다. 왜냐하면 허약인간은 이러나저러나 태생적 나약함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전에 즐거운 걸 모조리 채워놔야 억울하지 않아 진다. 그렇다면 튼튼 인간은 운동을 해서 체력을 비축해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항변하자면 허약인간은 운동을 해도 아프기 마련인지라 솜털처럼 가볍게 움직여 줘야 평소의 일상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 튼튼 인간 흉내라도 냈다가는 다음 일주일 거동이 어려울 수도 있다. 튼튼 인간의 눈에는 이게 엄살이라든가, 의지박약으로 비칠 수 있는데, 그건 본인들이 허약인간으로 하루라도 살아보고 재고해 보길 바라는 바다. 난 우리 친구들이 모두 허약인간이라 좋다. 아무리 유유상종이어도 이런 것까지 닮을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염증성 질환의 재발과 종잇장 같은 면역 체계로도 노는 걸 포기할 수 없는 허약인간의 습성이 조금씩 있기에 서로만이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을 공유하게 된다.

샤워장에서 씻는 건 흡사 진흙과의 전투였다. 아무래도 입자가 곱다 보니 씻어도 씻어도 어딘가에서 진흙이 계속 나왔다. 종래에는 내가 진흙인지, 진흙이 나인지, 반문하게 되어 마치 진정한 물아일체의 상태에 도달한 것만 같았다. 진흙인간이 된 걸 인정하자, 결심이 서고 나서야 샤워장을 나설 수 있었다. 저녁은 조개삼합구이. 늦게 도착한 친구들까지 도란도란 조개구이판 위로 8명의 머리가 맞대어졌다. 경쾌한 소리를 내며 구워지는 해산물과 고기, 참지 못하고 추가한 해물라면과 된장찌개, 너무 짜면 안 되니까 더 추가한 밑반찬과 공깃밥으로 테이블이 가득 메워졌다. 태생부터 잦았던 위장 질환과 최근까지도 난리였던 식도염 때문에 쫄아버린 내 위장이 원망스러워지는 거대한 한 상차림이 완성되었다. 젊을 적에는 나도 먹보로 (우리 가족 중에서는) 이름 꽤나 날렸는데 이제 서른 줄에 들어서니 옛 영광스러운 날들이 아득하다. 그래도 바다까지 와서 깨작거릴 수는 없다는 생각에 다시 마음을 굳게 다잡고 수저를 들게 된다. 열심히 먹자, 아자아자 화이팅. 한 숟갈 뜨고 나면 뜨끈하게 올라오는 기운에 온몸이 나른해진다. 여름방학의 맛, 아찔하게 구수하다.

숙소로 돌아와서는 파티룸을 만들었다. 내가 모르고 두 번 주문한 파티풍선팩이 있어 하나를 들고 왔다. 자이언트베이비 지현이의 생일과 조용하지만 강한 지수의 경사를 축하하기 위함이었다. 풍선을 불고, 달고, 벽에 널었는데도 영 비주얼적으로는 시원찮은 결과물이긴 했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우리의 순수한 노력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라고 긍정적으로 순화시켰다. 친구들하고 얘기하는 건 왜 이렇게 매번 재밌는지 모른다. 똑같은 얘기 또 해도 웃긴다. 그래서 웃다가, 먹다가, 마시다가, 중얼거리다가, 잤다.

나의 귀여운 베이비걸들에게,

나는 우리 베이비걸들이 언제나 행복하기를 바라고 있어. 하지만 각박한 현실에서 그러기가 뭐 쉽겠니. 그 와중에도 매일매일 자기 자리에서 열심히 제 몫을 해내며 살아가는 베이비걸들이 정말 멋지고 대단하다고 생각해. 사람들이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고들 말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그렇다고 해서 별로 가까이 있는 거 같지는 않거든. 그래도 우리가 지금 사는 것처럼 멈추지 않고 매일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면 가는 길 속에서 느끼는 작은 뿌듯함이나 소소한 기쁨 정도로도 우린 충분히 즐거울 거야. 아프지들 말고 다음에 또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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