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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황금빛의 나라

by 이해린

9월의 스페인은 너무 시시했다. 한낮의 볕은 내 살을 벌겋도록 익게 만들었으며, 주말 두 시에도 시내 거리는 한산하다 못해 황량했다. 그들의 언어는 귀를 쨍쨍하게 울렸고, 마트에서 산 오렌지에서는 떫은맛이 났다. 스페인에 다시 돌아올 일은 없겠다고 확신했다. 떠날 때의 마음은 그랬다.


왜 하필이면 다시 스페인으로 가게 되었는고, 돌이켜 생각해 보면 굳이 스페인이 되어야 할 분명한 이유는 없다. 여러 가지 애매한 이유들이 모여 어쩌다 보니까 다시 스페인이 되었을 뿐이다. 기대가 되지는 않고, 불안감만 차오른다. 그러다 돌아서면 설렘이 고개를 내밀다가 안심하려는 찰나에 돌연 무서워진다. 감정과 생각이 돌고 돌다 보니 스페인행 비행기에 타는 그 순간까지도 내 마음은 갈피를 못 잡을 것만 같다. 잡으나, 못 잡으나 상관없이 갈 곳은 정해져 있지만 말이다.


여태 스페인은 여러 차례 다녀왔다. 다섯 살 때 가족과 유럽에서 거주할 때 당시 살던 곳과 가까웠던 북부 스페인 등지를 놀러 가고, 스물두 살 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를 홀로 여행했다. 스물일곱 살, 남부 스페인에서 석사를 하며 한 학기 동안 주말이나 시간 날 때마다 남부 스페인과 작은 소도시를 혼자 또 여럿이 구경 다녔다. 따지고 보면 스페인은 그 채로 낯선 공간은 아니긴 한 셈이다. 그럼에도 친근감이 들지 않는 건 내가 마음을 내주지 않아서일까, 정을 붙이려 크게 노력하지 않아선가. 어떤 이유인지는 구체적으로 몰라도 내 마음속 스페인은 내게 주는 거 없이 미운 정도는 아니더라도 받는 거 없이 좋은 곳으로 자리매김하지는 않았다.


어떻게 한 나라와 그와 동반되는 모든 것들을 마음에 들어 할 수 있겠냐, 어차피 집 떠나면 고생 아니냐 싶을 수는 있다. 하지만 나는 그대로 두어도 끌리는 공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공간과 나 사이의 상성이 잘 맞고 주파수가 엇비슷한 것이다. 내게는 대전 시청 근처와 경주 첨성대, 남산으로 올라가는 언덕길, 따뜻한 남쪽 나라 휴양지, 파리 7구가 그러하다. 그 잣대를 들이밀었을 때, 스페인은 나랑 상극은 아니어도 덮어놓고 서로 찰떡궁합은 아닌 모양이다. 그래도 속단은 이르다. 첫인상이 존재를 만날 때 중요하긴 하다만, 함께 엮여 나가며 발전하는 관계도 있으니 말니다.


다시 출국을 준비하며 스페인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된다. 학업에 몰두하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스페인을 떠올리나 싶다가도 몸담을 공간에 전적으로 영향받는 건 당연하니 중요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번에는 조금 더 정을 붙이려고 노력하고자 한다. 더 열린 마음과 밝은 눈으로 스페인과 그곳의 사람들, 언어와 풍경, 음식과 온도를 마주할 것이다. 그들 중 하나가 되기는 어렵더라도 그들과 가까운 이방인이 되어 그들의 즐거움을 함께 누리고 싶다.

스페인의 저녁은 아름답고, 노을이 드리우는 색채는 깊고 진하다. 천천히, 게으르게 건물 외벽을 타고 흐르는 황금빛 석양을 떠올리고 있자면 스페인의 한 구석을 아끼는 방법을 찾은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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