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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편안 Dec 25. 2020

이거 저 주시는 거예요?

<직장에서 선물을 생각하다>

경기도 연구 회사에서 일하던 신입 때였다. 처음 근무했던 대구 지역을 떠나 경기도에 있는 두 번째 회사에 입사했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수도권 생활을 누리면서 내 삶에 새로운 꿈이 넘칠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나라는 사람이 그대로라서 그런지, 회사에서 한 일이 비슷해서 그런지, 놀랍게도 생활이 똑같았다. 힘이 쭉 빠졌다. 그래도 첫 회사와 달리 말이 통하는 동료 연구원을 만났다. 초반인지라 내 사투리의 출처가 어딘지, 왜 올라왔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정도로 가볍게 대화했지만, 전에 질문만 던지고 사라지던 동료와는 달랐다. 반가워서 친구처럼 지내고 싶었지만, 사회생활에서 겪은 떠돌이 기억 때문에 마음을 열기가 겁이 났다. 괜히 또 혼자 좋아서 열었다가 뾰족한 가시에 찔려 생채기를 내긴 싫었다.


그때마다 스스로 한 말은 '회사는 공적인 것만 존재한다. 사적인 감정이 섞이는 순간 끝이다.'였다. 지금도 동의하지만, 회사에서 동료로 의미를 확장한다면 동의할 수 없다. 친구 같은 연구원을 만난 후, 생각이 변했다.




"이거 저 주시는 거예요?" 동료의 손에서 내 손으로 곰돌이 푸가 그려진 책이 오는 것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당황해서 감사하지도, 거절하지도 못한 채 재차 질문했다. 함께 일한 지 얼마 안 됐고, 조금 말을 나눈 것뿐인데 왜 선물을 주는지 궁금했다. '혹시 부탁할 게 있으신가? 내가 뭘 놓치고 있나?' 그 짧은 순간, 오만 생각을 하고 있는데 복잡 미묘한 표정을 봤는지 설명이 덧붙었다.


"책 좋아하는 거 같아서요."

"아...... 감사합니다!"


이해를 위한 설명에 나는 더 혼란스러웠다. '책을 좋아한다고 말했던가? 내가 부담을 줬나? 나도 뭘 줘야 하나?' 그래도 선물해준 마음이 감사해서 인사를 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책을 가방에 넣었다. 기분이 얼떨떨했다.


다시 실험대로 돌아가 일하는 데 도무지 집중이 안 됐다. 선물을 준 목적이 뭘까에 대한 망상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눈이 마주쳤다. 환하게 웃는 동료의 얼굴을 보니 진심으로 준 선물 같았다. 마음이 붕 떴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나는 거리낌 없이 기뻐할 수 있었다.


집에 와서도 책상 위에 책을 두고 계속 쳐다봤다. 초기엔 아직 퇴근이 늦지 않아서 사색에 빠질 시간이 많았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 새 책의 녹녹하고 쌉싸름한 종이 냄새가 났다. 하나하나 읽고 그림을 음미할수록 선물에 담긴 마음이 전해왔다. 동료의 대변인이 된 곰돌이 푸가 몽실하고 폭신한 손으로 나의 어깨를 통통 치며 말했다.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 따뜻했고, 편안했고, 고마웠다. 낮에 했던 행동과 생각이 떠올라서 부끄러웠다. 이대로는 잠을 못 이룰 것 같아서 출근할 때마다 침대 위에 두는 숙면 왕 곰돌이를 출동시키기로 했다. 인형을 번쩍 들었다. 곰돌이 앞에 책을 세우고 어설픈 실력으로 여러 장을 찍었다. 사진에는 '잘 읽었고, 앞으로 잘 돌보겠다.'라는 마음을 담았다.



휴, 겨우 사진 한 장을 건졌다. 나는 고맙다는 말과 사진을 전송했다. 내 마음이 잘 전해지길 바랐다.




같이 지낼수록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살아가는 소소한 이야기부터 책, 미래, 퇴사까지 생각을 공유했다. 친구가 되어갔다. 자연스럽게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마음이 가장 좋은 선물이라지만 손에 닿는 뭔가를 주고 싶었다. 선물은 책으로 금방 결정했다. 대화할 때, 책 이야기에 반짝이던 눈빛을 기억해둔 덕분이었다. 문제는 언제 줄지가 어려웠다. 이미 선물을 받은 후라서 마치 네가 선물을 줬으니 나도 줘요, 라는 주고받기(Give and Take)로 보이는 건 별로였다. 혼자 끙끙거리고 있는데 우연히 10월 초가 생일인 것을 알았다. 이제 생일 선물을 고를 차례였다.


나는 대형서점도 가지만, 동네 책방을 가는 것을 참 좋아한다. 다소 규모는 작아도 못 보던 책을 만날 수 있고, 잘 보던 책이라도 아늑한 느낌에 둘러싸인 편안함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점을 가는 것만큼 책을 고르는 과정도 즐겁다. 책을 고를 때, 나를 위해서는 신나게, 누군가를 위해서는 두근거리며 이 책을 읽게 될 미래를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상상하며 늘 바란다. 좋아했으면 좋겠다고.


어디 보자. 동료를 떠올렸다. 어떤 책이 좋을까?

나도 키가 작지만, 더 작아서 귀엽고 예쁘다.

생각이 깊고, 마음이 여리고, 늘 자기 성찰을 한다.


나는 어떤 책을 선물하고 싶지?

손과 눈에 오래 머물면서 잠시나마 어려운 삶을 잊고 책 세상에서 쉼을 누렸으면 한다.


먼저, 그림책이 있는 곳으로 가서 둘러보았다. 대부분 귀엽고 좋아 보였지만 어울리는 책은 보이지 않았다. 다음으로 내 취향인 문학책이 꽂힌 곳으로 갔다. 각양각색의 책등을 손으로 쓱 훑다가 한 책에 멈췄다.


또다시 같은 꿈을 꾸었어_스미노 요루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스미노 요루 작가의 다른 소설로 초등학생 나노카가 자신의 10대 말, 어른, 노년 때를 만나 미래가 될 뻔한 모습을 마주하며 삶의 방향을 찾아가는 이야기이다. 문체도 동화 같아서 주인공과 가깝게 만나는 느낌이 든다.


나는 작가별로 작품을 읽는다. 작가의 한 작품이 재미있으면, 소시지처럼 줄줄이 다른 작품을 찾아서 읽는다. <노인과 바다>를 시작으로 어니스트 헤밍웨이 작가의 책들을 읽었고, <너의 목소리가 들려>부터 김영하 작가의 책들을 좋아하게 됐다.


<또다시 같은 꿈을 꾸었어>도 마찬가지였다. 이 책은 마음 깊숙이 있던 나의 어린아이를 친근히 불러와 삶을 되짚어보게 했다. 귀여운 주인공과 삶을 걸어 보고, 손에도 오래 머물며 쉼을 누릴 수 있는 딱 어울리는 책이었다. 아직 1달 넘게 생일이 남았기에 참다가 사기로 했다. 혹시라도 주기 전에 구겨지거나 다치면 속상하니까.


드디어 10월 초가 되었다. 어젯밤부터 고이 가방에 넣어뒀던 책을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꺼냈다. 아침에 책을 주면서 기분 좋은 하루를 응원하려 했는데, 타이밍을 놓쳐서 황급히 서랍에 넣었다.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다.


"음, 선물이에요." 책을 건넸다. 왜 주는 내가 긴장했는지 모르겠다. 책벌레인 엄마 빼고는 주변에 책을 읽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더 귀한 순간이었다. 눈이 마주쳤다. 서로의 눈동자에서 진심이 반짝이고 있었다.


회사는 공적인 곳이지만, 함께 있는 동료는 모두 사적인 감정이 있는 사람이다. 가끔 서로에게 마음을 선물해보는 건 어떨까.


시간이 지나 회사를 나왔지만, 자주 그때 생각이 난다. 퇴사 이후 바쁘다는 핑계로 한 번도 못 만났는데, 이젠 마스크 안에 갇혀 더욱 만날 수 없게 되었다. 만나러 갈 걸 하는 후회가 남지만, 그만큼 기분 좋은 그리움도 함께라서 다행이다.


물건보다 마음을 담아 준비하는 과정이 더 선물인가 보다.

지금도 책을 고르며 행복해하던 내 모습이 떠오르는 걸 보니......


선물

남에게 어떤 물건 따위를 선사함. 또는 그 물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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