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스스로 태어날 수 없고, 혼자 살아갈 수 없다.책은 부모와 닮았는데, 부모는 ‘우리’다. 한 세상 속에서 다양한 생각을 품은 채 살아가는 우리는 친구와 수다를 떨며 이야기를 꾸미고, 가족이 하는 말을 따박따박 고쳐대고, 뉴스 기사를 보며 고개를 흔들고, 모처럼 쉬는 날엔 벌러덩 누워 책을 읽는다. 고로 우리는 작가이자, 편집자이자, 비평가이자, 독자이다. 단지 가장 선호하는 모습이 있을 뿐이다.
나는 어떤 모습을 가장 선호할까?
제임스 미치너의 <소설>을 읽다 보면 자꾸 소설이란 걸 잊는다. 너무도 선명한 인물 묘사와 투명하게 전달되는 감정에 실제 사람들이 쓴 책 이야기로 착각한다. 그 덕분일까 작가 루카스 요더를 통한 세계관에 익숙해지자 편집자 이본 마멜, 비평가 칼 스트라이버트, 독자 제인 갈런드 편은 술술 책장이 넘어갔다. 특히, 이본 마멜이 삼촌 덕분에 책을 읽고 사랑하게 되는 과정과 제인 갈런드가 손자인 티모시 툴이 한 말을 이해할 정도로 독서의 단계를 밟아가는 과정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나에게도 처음 책을 접했을 때가 있었고, 사랑에 빠진 시점이 있었다는 걸 다시금 떠올릴 수 있었다.
하나의 소설이 책으로 태어나기까지 글을 사랑하는 여러 분야의 사람이 필요하다.
작가는?
형태가 없던 이야기를 보이는 세계로 써내고
편집자는?
그 세계가 책으로 열릴 수 있게 생기를 불어넣고
비평가는?
열린 세상에 날개를 달아 독자에게 날리며
독자는?
책이 영원히 생명을 띠고 살아가게 한다.
주로 독자로 생활하다 보니 작가가 써낸 이야기와 나의 관계만 봤으나, <소설>을 읽고 나자 책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졌다. 보이지 않던 영역을 추측하며 지금도 누군가는 재미난 이야기를 쓰고 수정하고 평가하고 있지 않을까 궁금하다.
오늘도 출판사엔 전국의 작가가 영혼을 꾹꾹 눌러 쓴 원고 더미로 가득하다. 매일 파도처럼 밀려드는 원고 속에서 책 보석이 될 반짝이는 글 원석을 찾아 이본 마멜 같은 편집자가 루카스 요더의 책처럼 아름답게 가공한다. 책은 탄생할 것이고 칼 스트라이버트와 다른 비평가들은 신랄하게 평가하며 현재의 이야기를 용감하게 담도록 소설가들을 장려하고 제인 갈런드와 나는 두근거리며 책을 펼친 후 이야기 속에 푹 빠져들 것이다.
우리의 삶이 담긴 소설이 좋다. ‘세상에 어떤 사람들이 살고, 어떻게 사는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등장인물을 만나고 같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나는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고 있지?’ 자연스럽게 고뇌한다. 그렇게 나를 만난다.
<소설>을 읽으며 당신은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 돌아보기를...
작가_루카스 요더
<저도 작가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그저 무덤덤하게 말하는 젊은 친구들이 이런 질문지 뭉치를 보고, 또 고쳤다가 다시 구겨 버린 저 원고 더미들을 보면 뭐라고 말할까?
편집자_이본 마멜
나는 부러진 오른팔로 책을 받치고 왼손으로 책장을 넘기면서 새로운 세계로 들어서게 되었다. 놀라운 것들이 가득 차 있는 세계였다. (…) 그러한 사실을 의식하지는 못한 채 나는 책을 사랑하게 되었던 것이다.
비평가_칼 스트라이버트
글로 써서 남기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독자_제인 갈런드
그의 모든 책들은 이 순간에도 살아 있는 듯했다. 마치 그것들이 이제 막 출판된 것처럼. 책이란 뉴욕에서 처음 출판된 날짜가 아니라 그것이 요하네스버그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또는 이스탄분 등지에서 독자의 손에 닿는 그 행복한 순간에 생명을 띠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