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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똥 Jan 12. 2024

옷을 사지 않는 마음

언젠가부터 옷을 거의 사지 않았다. 사실 작정한 일은 아니었다. 살다 보니 내게 옷은 그리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백수? 노노! 나는 어엿한 직장인이자 아이들의 엄마이다.


나는 과거 인터넷 쇼핑을 즐겨했고, 퇴근 후 직장동료와 백화점이나 보세옷가게에 들러 구경하는 걸 좋아했다. 매대에 있는 옷은 기본이고, 예쁘다고 생각되는 옷은 당장 필요한 옷이 아니더라도 구입했다. 얇아 보이는 옷은 내년 봄에 입으면 되고, 두꺼운 옷은 몇 달 후에 입을 수 있겠다며 언제 입을지 모를 옷을 장롱에 쌓아뒀다.  겨울이면 해마다 유행하는 패딩이나 코트가 있어야 했고, 작년에 입었던 옷은 싫증이 나서 입기 싫었다.  옷은 멀쩡했으나 왠지 색상이나 디자인이 유행에 뛰 떨어지는 같았다. 그렇다고 패션의 선두주자도 아니었다. 달라붙는 스키니가 유행일 때는 스키니를 입어야 했고, 통바지가 유행일 때는 남들 입는 스타일대로 입는 게 유행을 따라가는 일이라 생각했다.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어도 옷을 모으는 취미는 여전했다. 하지만 몸에 맞지 않는 옷들은 그림의 떡이었다.  지금 당장 입을 수는 없어도 살을 빼면 입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맞는 옷보다  입을 수 없는 옷이 예뻐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장을 보기 위해 대형마트에 날이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장난감 코너를 갔다가 바비인형이 가득 진열된 곳을 지나쳤다. 길게 뻗은 날씬한 다리와 잘록한 허리사이로 웨이브 머리와 심플한 드레스를 입고 있는 바비인형이 있었다. 바비인형 곁에 있는 거울에 비치는 모습은 그야말로 뚱보 아줌마가 따로 없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 인터넷 의류 쇼핑몰을 돌아다니며 예쁜 옷 전부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덕분 우리 집 장롱은 불필요한 손이 가지 않는 옷들로 수두룩했다. 심지어 장롱문이 닫히지 않을 정도였다. 이렇게 많은 옷들 중에  자주 입는 옷은 두서너 불과했다

 

그즈음 엄마들 카페에서는 헌 옷을 팔고 치킨 값을 벌었다는 게시글이 종종 올라왔다. 나도 이참에 대청소도 할 겸, 입지 않는 옷을 과감히 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버릴 옷과 들고 다니지 않는 가방을 조금 모아보니 30킬로가 훌쩍 넘었다. 헌 옷 수거 아저씨는 옷을 받은 대가로 내게 만 칠천 원을 주었다. 그날 저녁 가족과 함께 실하게 생긴 닭다리를 뜯으며 또 버릴 옷이 없을까  장롱 안을 서성이던 자신이었다.


닭다리를 먹던 이후부터 나는 마음속 굳은 결심을 했다. 티셔츠 한 장 가격도 안 되는 돈을  바에야 지금부터 옷을 사지 않겠노라고.  옷은 최소한 자주 입는 옷 몇 벌만 있으면 된다. 이를테면 6일 근무를 하는 나는 상 하의 옷 세 벌만 있으면 된다. 티셔츠가 장이라면 바지만 바꿔 입어도 새로운 옷으로 입을 수 있다. 겨울 외투는 4년이나 지난 남색 코트와 롱패딩으로 올해를 나고 있다. 4만 원짜리 보세 어그부츠로 발을 따듯하게 하고 있고, 가방은 휘뚜루 마뚜루 들 수 있는 가벼우면서 튼튼하고 책과 다이어리가 포근히 담기는 걸 좋아한다.  누구나 알고 있는 명품 브랜드인 '루똥', '샤샤', '프로닥', '꾸찌지'도 필요 없다. 실제로 이런 명품은 하나도 갖고 있지 않지만, 갖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물건만 명품이면 뭣하나, 사람이 명품이어야 그게 찐이지!  나는 어설픈 명언을 만들어 종종 혼잣말을 되뇌었다. 옷장 안에 옷이 가득 넘쳐서 무엇을 고를까 고민할바에는 손에 닿는 대로 옷을 입는 일이 편하고 바쁜 출근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여섯 살 우리 아이들도 단벌신사라 불러주면 좋겠다. 아이들은 하루에 한 벌씩 빨래를 해야 해서 상, 하의 다섯 벌이 있는데, 어린이집은 5일이니까 다 섯벌이면 충분했다. 아이들은 활동이 많아서 최대한 편한 맨투맨 티셔츠나 쫄바지를 즐겨 입는다.  쫄바지를 입으면 새처럼 가느다란 다리가  부각되긴 하지만, 그럼 어떠랴. 쫄바지 패션이야말로 아이들에게는 내복을 입은 것처럼 편하니 말이다.


아이들과 내가 단벌신사가 된 이후부터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옷 한 벌을 만들기 위해서는 욕조 약 11통의 물이 사용되고, 섬유를 염색하면서 화학 물질이 배출된다고 한다.  염색과 처리 과정에서 지하수와 하천의 수질이 악화된다. 세계 공업용수 오염 원인의 20%가 의류 때문이다. 옷을 만들며 원료를 조달하고, 방적, 염색, 봉제, 유통 과정에서 수많은 화석연료를 필요로 하는데, 이 과정에서 생기는 온실가스는 전 세계 탄소 배출량의 10%를 차지한다.


자, 그럼에도 유행을 따라간다고 새 옷을 자주 구매할 수 있을까. 유행은 유행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젊은 사람은 젊은 모습 그대로 아름답고, 노년은 노년대로 중후한 멋이 있다. 그 멋은 예쁜 옷으로부터 시작되는 게 절대 아니다. 남루한 옷을 입은 할머니가 도서관에 앉아 책을 읽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나는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녀가 절대 초라하거나 불쌍해 보이지 않았다. '지혜'라는  예쁜 옷을 입는 일만큼 멋진 일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단벌신사로 사는 걸 브런치를 통해 자랑하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룰루랄라 한 일이다.




새해에는 흘러가는 시간을 잠시 멈추어 세워 나의 '일상을 살피는 마음'을 가지려고 합니다.

의미 없이 지나친 순간도 그러모으면 하루를 사는 비타민 한 줌이 될 거라 믿어요. 아무리 바빠도 매일 글쓰는 작가 다섯이 꾸려가는 공동매거진 <일상을 살피는 마음>을 구독하고 당신의 일상에도 영양을 듬뿍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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