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부터 어떤 대상을 깊이 좋아하는 친구를 보면 부러웠다. 내 밍밍한 애정은 어디에도 속할 데가 없는 것 같아서.
그런 나에게도 알고 보니 오랜 덕질 대상이 있었던 것이다.마음을 붙잡는 시시콜콜한 이야기, 발에 쉽게 채이는 것 같지만 실은 보거나 듣다 보면 이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이야기잖아, 싶어지는 그런 이야기.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김신지 에세이 p.91
학창 시절 쉬는 시간이면 노트에 끄적이는 걸 좋아했다. 워낙 말수가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친구가 많은 편에 속하지도 않았다. 친구들끼리 서로 어울려 수다를 떠는 동안 나는 자리에 앉아서 묵묵히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들을 옮겨 적었다. 솔직히 조금 외로웠다. 외로운 마음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기록'이라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았다고 해야 할까. 그래, 조금 이른 나이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릴 적에도 아이돌가수를 열광적으로 좋아하거나, 인기 농구선수를 응원하던 친구, 드마라속 멋진 남자배우를 좋아했던 친구 등 다양한 대상을 향해 덕질했던 친구들이 많았다. 연예인을 좋아하는 친구들은 늘 바빴다. 아이돌 가수가 출연하는 가요프로그램과 쇼프로는 무조건 챙겨서 봐야 했고, 농구선수가 나오는 운동경기는 빠짐없이 봐야 했으며, 일정 요일이 되면 그가 나오는 드라마를 챙겨봤다. 수업이 끝난 시간이면 누가 어떤 프로그램에 나왔는데 어떤 옷을 입었고, 어떤 춤을 추었는지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가 따로 없었다. 그래, 화려한 덕질이란 게 바로 이런 거지. 하지만 나는 친구들과 어울릴만한 덕질이 따로 없었다. 아이돌가수도 싫어하지, 농구선수 이름도 모르지, 남자배우들도 얼굴은 알지만 누가 누군지 모르지, 모르는 게 너무 많은 소녀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 애정은 친구들에 비하면 밍밍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친구들과 다르게 혼자 즐기는 소심한 덕질을 즐겼다. 그저 라디오에 무심코 흘러나오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던 음악을 모으는 취미가 있었다. 음악은 살포시 마음을 움직이다가 어느 순간 고요해진다. 내가 듣고 싶을 때까지 계속 듣고 싶지만,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은 구간반복이 어려웠다. 레코드가게에서 공테프를 하나 산다. 공테이프를 카세트에 넣고 언제든 흘러나올 수 있는 노래를 기다리다가 드디어 찾던 노래가 들리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래, 바로 이때다. 나는 준비해 놓은 공테이프에 빨간 색깔로 되어있는 '녹음버튼'을 있는 힘껏 누른다. 딸칵하는 소리와 함께 노래는 영영 내 가슴속에 파고든다. 잠이 들기 전까지 듣고 또 듣는다. 그러다 문득, 노트를 찾아 노래 가사를 옮겨 적는다. '이건 좀 내 마음을 닮았네.'
단 한 번도 텔레비전에서 보지 못한 가수를 좋아한다는 것. 그가 부른 노래를 수집하며 노트에 기록하고, 수업시간마다 노래가사를 들여다보는 일은 아무리 봐도 인기 없는 덕질이 틀림없었다. 내 노트를 본 친구들은 한결같이 재미없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왜 쓸데없는 짓을 하느냐고, 이럴 시간에 우리 오빠가 나오는 가요 프로그램 하나 더 보겠다면서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세월이 흘러 나도 친구들도 모두 나이가 들어서 그녀들도 아이 엄마가 되었고, 나는 생각지 않던 쌍둥이들이 세상에 태어나며 '나 자신'이 아닌, '엄마'로써의 삶에 충실히 살고 있다. 가끔 궁금해진다. 친구들은 지금도 그 시절 덕질을 아직도 하고 있을까? 춤추고 노래하던 그 시절의 가수, 농구선수, 드라마 속 남자배우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을까? 문득 덕질을 할 수 있는 유효기간에 대해 궁금해졌다. 우리가 나이가 든 것처럼, 이미 그 시절 스타들도 중년 가수나 배우, 과거에 활동했던 운동선수로 변해있을 테다. 그러나 나는 친구들과 다르게 지금도 시절에 듣던 노래를 즐겨 찾는다. 요즘은 유튜브가 대세여서 오래전 노래도 검색만 하면 영상과 함께 흘러나온다. 어쩌면 내가 즐겨했던 덕질은 시대가 변하면 변할수록 더욱 편리하게 즐기게 될 수 있으니, 재미없던 덕질이 드디어 빛을 발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게다가 블로그나 브런치스토리처럼 글을 쓸 수 있는 플랫폼이 언제나 열려있으니 나만 시작한다면 어떠한 형태로든 기록할 수 있다.
그때 내가 좋아했던 노래가사 중 하나. 앨범재킷이 좀 구닥다리 같지만 노래 가사는 지금 시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훌륭함을 갖고 있다.
내가 태어날 때 부모님은 날 보며,
수많은 생각과 기댈 하셨겠지.
어릴 때나 지금도 변함없는 건
자랑스러운 나를 보여주는 일.
시간은 언제나 나를 반기고,
저 파란 하늘은 이렇게 날 지켜보고
나만 시작한다면 달라질 세상,
나 진정 원하는 그 일을.
슬프면 슬픈 대로 나를 떠맡겨도 부서지지 않을 수 있는,
커다란 인생의 무대 위에서 지금부터 시작이야.
-2.5. 공. 감 / 나만 시작한다면
여전히 지금도 누군가에게는 필요 없어 보이는 덕질을 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내가 하는 덕질을 통해 꿈을 이루게 될 거라고, 노래 가사처럼 나만 시작한다면, 달라질 세상. 나 진정 원하는 그 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