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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정 Oct 16. 2024

그래서, 올레길 14-1코스

문도지오름

제주에서는 새벽에 깨지 않고 단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보니 비가 차분히 내렸다. 비 비린내보다 풀과 흙이 뒤엉킨 풋내에 기분이 좋았다. 현지인처럼 자연스럽게 냉장고에서 야채들을 꺼내 깨끗이 씻고 채 썰어 소금 한 꼬집 넣고 볶았다. 마트에서 산 김치와 조미김으로 단출하게 아침상을 차렸다. 수수한 찬이나 맛은 개-꿀맛이었다. 왁자지껄한 아침을 정리하고 날씨가 심상치 않아 비옷을 챙겨 동반자와 올레길 출발!

간선버스를 타고 방림원에서 하차했다. 방림원은 식물과 함께하는 치유의 공간으로 야생화 박물관인데 입장료가 있어, 그냥 패스했다. 하늘이 끄물끄물, 다행히 비는 내리지 않았다. 왼쪽에 꽤 규모 있는 골프장과 오른쪽에 마중오름을 두고 사잇길을 걸었다. 포장길이지만 숲길을 걷는 느낌으로 기분은 상쾌했다. 호젓한 오솔길이 계속 이어졌다. 어쩌다 좁은 숲길로 자동차가 지나가면 행성에서 비행물체를 만난 듯 몸 둘 바를 몰라 어색해졌다.


말을 방목해서 키우는 명성 목장에는 벌써 몇 팀이 있었고, 자동차도 여러 대 주차됐다. 외길이라 이곳을 지나야 ‘문도지오름’에 갈 수 있다. 조랑말들은 이 구역 터줏대감으로 아침부터 들이닥친 방문객에 벌써 지친 기색이다. 사람이 다가와도 개의치 않으며 낯가림도 없다. 순한 강아지 같다. 사람 뒤를 졸졸 따라오며 스스럼없이 대하는데, 되려 사람인 내가 뒤쫓아 오는 조랑이를 보고 호들갑이다.

명성 목장부터 문도지오름 전체가 개인 사유지다. 인심 좋은 주인장 덕분에 ‘호사를 누린다.’ 생각에 저절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살다 보면 부지불식간에 누군가의 따듯한 배려를 종종 마주할 때가 있다. 하천가에서 쓰레기를 줍는 이들, 눈이 펄펄 내리는 새벽 골목길을 쓰는 이들, 사람이 붐비는 장소에서 뒷사람을 위해 출입문 끝을 살짝 잡아주는 이들을 대할 때 나도 누군가에게 따뜻하고 무던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다. 훈훈한 생각을 습관처럼 자주 되뇌면 어느 순간 나도 사소한 배려가 몸에 익은 사람이 돼 있어 좋다.

이번 올레길에 동반한 송 언니가 바로 무던하고 따뜻한 사람이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맺은 인연으로 10년이 훌쩍 넘었다. 외향형으로 좋아하는 배우님의 팬클럽에 가입할 만큼 활달하지만, 매사 조심스럽고 생각이 많은 사람이라 좀체 선을 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의 인생에 훅 들어가는 법이 없어 송 언니와 친해지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한 번 맺은 시절인연은 쉽게 풀리지 않아 바쁜 생업으로 자주 왕래는 못해도 끈끈해졌다. 가끔 오이피클을 보내오고, 무심하게 잘 지내는지 안부를 묻는다. 그리고 어떤 휴일에는 걷는 즐거움을 함께 나눈다. 이번 올레길도 송 언니와 함께해 든든하다.     

오름의 들머리에서 정상까지 과장을 조금 보태 한걸음에 올라갈 수 있었다. ‘문도지오름’ 정상은 카스텔라처럼 황톳길이 보들보들 보드랍다. 올라오는 수고에 비해 펼쳐진 풍경은 신이 나에게 보내온 선물 같다. 하늘은 여전히 비를 가득 머금었다. 오름 정상에 앉아 꼬꼬지 시간여행을 떠났다. 높지 않은 오름이지만 한라산과 주변에 봉긋 솟은 오름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낯가림 없는 조랑말들은 탐방객의 인기척에도 여전히 평화롭다. 말에게 양해를 구하지 않고 불쑥 찾아온 손님 같아 미안했지만, 평온한 시간을 보냈다. ‘문도지오름’ 출구를 나올 때 ‘경고, 제발 문을 열어 놓고 가지 마십시오’ 푯말이 있었다. 공간을 배려해 준 감사한 마음에 한 번 더 힘을 줘 문을 꼭 닫았다.

곶자왈 안으로 들어선 순간 비를 머금은 원시림이 몸에 착 감겼다. 14-1코스는 혼자 말고, 두 명 이상 걷고, 역방향이 아닌 순방향으로 걷기를 추천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곶자왈에 들어가니 숲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블랙홀 같았다. 이정표나 리본이 없었다면 방향을 분간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 “기운이 이상해!”, “너무 스산해!”하며 걸었다, 순간 동화책을 찢고 나오는 ‘백설 공주님’을 만났다. 우리 맞은편에서 미니스커트 차림으로 한 손에는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쥐고 해맑게 걸어왔다. 우리는 동시에 말했다. “헉! 이거 실화야?”, “이 곶자왈에 용감하네! 혼자서!”. 다가오는 용감한 백설 공주에게 “혼자 오셨어요? 바닥이 미끄러우니 조심해서 걸으세요!” 걱정 가득 말했다. “네, 네!” 수줍게 대답했다. 용감한 백설 공주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뒤돌아봤다. 곶자왈에 사람이 없어 음산했고, 우리는 오설록에 도착할 때까지 백설공주 걱정을 사서 하며 내려왔다.


이대로 숙소로 향하기에 억울했고, 시간이 어정쩡했다. 그래서 16코스 종착점에서 숙소까지 역방향으로 걷기로 했다. 비는 여전히 내렸고 우리는 225번 간선 버스를 탔다. 비가 내려 구간 정차가 심했다. ‘광령1리 입구’ 정류장에 내려 골목골목으로 짧은 길을 찾아 걸었다. 도로가 막혀 택배차와 승용차가 골목길로 밀려와 걷다 멈추기를 반복했다. 그 와중에도 비바람 덕분에 꽃보라가 날리니 어수선한 시간도 멋지기만 했다.    

  

올레길은 순간 한눈을 팔면 다른 길로 빠지기 쉽다. 해서 역방향보다 순방향으로 걷는 걸 선호했다. 어느 지점까지 잘 걸었는데, 업무상 걸려 온 전화를 받으며 걷다가 올레길 코스를 한참 벗어났다. 다시 방향을 찾아 걷다 보니, 인적 드문 농로를 계속 걷게 되었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날은 어둑어둑해지고, 화장실은 급하고, 우리 말수는 줄어들고 분위기는 싸해졌다.     

신기한 토성을 발견하고 그제야 말문이 뜨였다. “이게 뭐지? 신기하다!”, “그러게?” 항파두리 항몽 유적지였다. 여몽 연합군에 대항하기 위해 삼별초 군의 거점지인, 항파두리에 흙을 이용해 3.8km 길이의 토성을 쌓은 것이다. 자연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여 언덕과 하천을 따라 축성했다는데 흙다짐을 반복해서 강도가 높게 만들어졌다. 토성 높이는 내 키보다 높았다. 6시 넘어 도착하니 관람은 고사하고 화장실 문도 잠겨있어 들어갈 수 없었다. 예기치 못한 변수를 만나면서 오늘도 새로운 날이 됐다. 인생 공부가 별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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