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에서도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는 인도 여성직장인의 현실
알지카르 의과대학(RG Kar Medical College)은 인도 북동부 콜카타(Kolkata)시에 위치한 국립대학으로 1886년에 설립된 유서깊은 교육기관이다. 인도 전체를 통틀어 가장 오래된 의과대학중 하나인 이곳에서 지난 8월 9일 아침 7시경 31세의 수련의가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옷은 절반 정도 벗겨져 있었고, 그녀의 눈과 하반신에서는 출혈이 있었다. 그녀는 전날 36시간이나 이어진 근무를 마치고 새벽 2시에 늦은 저녁을 먹은 후 세미나실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있었다. 피곤에 찌들어있던 그녀는 제대로 저항도 못해보고 성폭행당한 후 살해당한 것이다. 성폭행 사건 자체로도 충격적인데 사건 발생 이후 벌어진 상황들 또한 너무나도 '인도스러워서' 안타깝고 슬프기만 하다. 이 사건 전후의 상황을 찬찬히 살펴보자.
[# 1] 가정폭력범, 자율방범대원 그리고 성폭력 가해자...
경찰의 수사결과 체포된 범인은 알지카르 병원에서 근무하는 산제이 로이(Sanjay Roy)라는 자원봉사자였는데, 우리나라로 치자면 동네 파출소에서 자율방범대원(civil volunteer)으로 위촉되어 활동하던 인물이었다. 병원 관계자와 환자를 지켜야할 인간이 오히려 성범죄자로 돌변한 것이었다. 특종에 목이 맨 인도 언론들은 앞다투어 가해자의 가족을 찾아 나섰다. 콜카타 경찰에서 하급직으로 일하고 있는 첫째 누이와 산제이와 같이 자율방범대원으로 일하고 있는 둘째 누이의 신원과 근무지까지 순식간에 드러났다. '산제이는 우리 가족에게 수치스러운 존재였다. 사형당하더라도 시체를 찾으러 가지도 않을거다'라는 독하디 독한 가족 인터뷰도 전파를 탔다. 경찰과 언론의 조사 결과 산제이는 이미 수차례 이혼한 경험이 있는데 음주와 가정폭력으로 인해 문제가 많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2022년과 2023년에 각각 가정폭력으로 인해 입건된 기록도 있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처벌은 없었고, 소액이기는 하지만 월급까지 받을 수 있는 자율방범대원으로 뽑혀서 경찰들과 같이 활동하게 되었다. 경찰 하급직으로 일하고 있던 그의 누이가 손을 써주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증거를 찾을 수는 없다. 정식 경찰도 아니면서 산제이는 자신의 모터사이클에 버젓이 콜카타 경찰 스티커를 붙이고 경찰과의 인연을 자랑하고 돌아다녔다. 젊었을때 약 2년간 알지카르 병원에서 요리사로 일했었던 산제이는 이제 경찰을 등에 엎고 병원을 들락거리며 사실상 경찰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동네 건달이 경찰 완장을 차고 환자들에게 '다른 환자보다 먼저 입원시켜주겠다'는 약속을 댓가로 뇌물을 받고 있을때 병원 관계자들은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병원장인 산딥 고쉬(Sandeep Ghosh)는 그를 자신의 꼬붕처럼 써먹으며 산제이의 행동을 눈감아주었다. 병원장의 비호를 받는 그가 드나들 수 없는 공간은 없었다. 범죄가 발생한 세미나실도 함부로 출입할 수 없는 곳이었지만 범행 당일 술에 만취해 있던 산제이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범행 직후 그는 평소 친분이 있던 현직 경찰의 집에서 드르렁드르렁 늦잠을 자고 있었다. 한마디로 자기는 잡힐리가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거다.
[# 2] 역대급 병원장의 수상한 행적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 병원의 원장인 산딥 고쉬가 이러한 사태를 초래한 근본 원인이라는 지적이 나오기 시작했다. 실제로 이번 사건에서 산딥 고쉬 병원장의 행적 중에 눈길이 가는게 한두개가 아니다. 우선, 피해자의 시신이 발견된지 3시간이 넘게 지난 후에 병원 관계자가 피해자 가족에게 전화를 걸었다. 처음에는 ‘수련의가 위중한 상태니 병원으로 와보셔야 할거 같다’라고 얼버무리다가 다시 전화를 걸어서는 ‘자살했다’라고 피해자 부모에게 거짓말을 했다. 병원에 도착한 부모는 3시간이 지나서야 시신을 확인할 수 있었다. 피해자가 자살한 것처럼 조작하려는 병원의 조직적 움직임이 있었고, 산딥 고쉬 병원장이 이러한 조작을 지시했을거라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정신나간 패드립 서비스도 잊지 않고 시전했다. 사건이 일어난 직후 산딥 고쉬 병원장은 '그렇게 늦은 시각에 홀로 그런 장소에 간 것이 무책임한 행동'이라는 발언을 했다가 언론과 대중들의 뭇매를 맞았다. 이런 식으로 성폭행 피해자를 비난하는 논리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2012년 12월 뉴델리에서 충격적인 집단 성폭행 사건이 있었다. 무려 여섯명의 남성이 버스에 승차한 여성을 성폭행하고 고문한 후에 길거리에 버렸다. 발견 당시 여성의 상태는 너무나 끔찍했기 때문에 여기에 적지 못할 수준이다. 2주 넘게 사경을 헤매던 피해자는 결국 사망했다. 그렇지 않아도 '강간의 왕국'으로 알려져 있던 인도가 다시 한번 세계인들에게 새롭게 각인되는 계기가 되었다. 몇년 후 영국의 BBC는 가해자 중 한명인 무케시 싱(Mukesh Singh)과 인터뷰를 했는데, 이때 그가 내뱉은 말은 이렇다. "제대로 된 여자라면 밤 9시 넘어서 그렇게 싸돌아다니지 않는다. 성폭행은 남자 보다는 여자의 책임이다." 산딥 고쉬 병원장이 한 말과 거의 일맥상통한다.
이런 생각을 가진 인간이 병원장으로 있었으니, 그 조직이 얼마나 성차별적이고, 여성에 대한 보호가 부족한 조직이었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의 과거 행적도 도마에 올랐다. 최근 삼사년 사이에 각종 부정부패 혐의로 2번이나 인사조치를 당했지만 2번 모두 정치권과의 끈을 이용해 인사조치를 무력화시키는 괴력을 발휘했다. 그와 함께 일해봤던 의사나 행정직원들은 대부분 그를 '내가 만난 가장 부패한 인간', '병원을 사유화해서 마피아처럼 운영하는 인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부하직원을 서슴없이 협박하는 무자비한 독재자'로 묘사했다. 병원장을 해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그는 사직서를 제출했는데, 웨스트 벵골 주정부는 그가 사임한지 채 하루도 되지 않아서 인근의 다른 종합병원 원장으로 발령했다. 여성 직원을 보호해야할 의무도 행하지 않고 피해자를 비난하는 역대급 드립을 날린 인사가 처벌을 받기는 커녕 정치권과의 연줄로 다시 한번 부활의 드라마를 보여준 것이다.
[# 3] 정치권으로까지는 논쟁.. 혼란에 빠진 콜카타...
사건이 벌어진 콜카타는 인도 북동부의 중심도시로 웨스트 벵골주의 주도(州都)이다. 인도 중앙정부는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이끄는 인도인민당(BJP)이 집권여당이지만, 웨스트 벵골주는 트리나물 콩그레스(TMC)라는 지역정당이 주정부를 구성하고 있고 마마타 바네르지(Mamata Banerjee)라는 여성 정치인이 2011년부터 현재까지 무려 13년 동안 주지사로 재임중이다. 조금 심하게 말하자면 웨스트 벵골주는 TMC 당과 바네르지 주지사가 지배하는 왕국이라고 보면 되겠다. 산딥 고쉬 병원장은 TMC당과 오랫동안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호의호식해왔다. 그 와중에 얼마나 많은 뇌물을 TMC당에 갖다 바쳤을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그 돈들은 다 어디서 나왔을까? 산제이 로이와 같은 수많은 꼬봉들이 선량한 환자로부터 한푼두푼 뜯어낸 돈, 각종 의료기자재 구매 계약, 건설공사 계약 등에서 받은 커미션, 그리고, 병원 직원들이 인사청탁하며 건넨 뒷돈에서 나왔다.
TMC당과 산딥 고쉬가 얼마나 끈끈한 관계인지는 금방 드러났다. 산딥 고쉬를 처벌하기는 커녕 다른 병원의 원장으로 임명하는 조치에 격분한 의사들과 의과대학 학생들이 시위를 벌이자, TMC당 소속 주의회 의원(Member of Legislative Assembly)이 2명이나 직접 병원을 찾아와서 시위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성폭행 사건이 벌어질때까지 국립병원의 허술한 운영에 눈길 한번 주지 않던 정치인들이 나타나서 병원장 구명 운동에 나서자 시위대의 분노 게이지는 한껏 치솟았다. 결국, 콜카타 지방법원은 더이상 콜카타 경찰과 주정부를 믿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 사건을 인도연방수사청(Central Bureau of Investigation)으로 이첩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
코미디스럽다 못해서 괴상한 수준의 일은 도무지 끝나지 않았다. 연방수사청의 수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성폭행 사건이 벌어진 세미나룸이 있는 병원 3층에 대한 레노베이션 공사가 갑작스럽게 시작되었다. 증거가 훼손될 위험성을 감지한 시위대는 격렬하게 항의했고 결국 뜬금없던 레노베이션 공사는 멈췄다. 소셜 미디어에는 웨스트 벵골 주정부 정치인과 병원 고위관계자들로 이어지는 의약품 밀매 조직이 활개를 치고 있는데 알지카르 병원이 그들의 주요 활동무대였다는 ‘카더라’식 괴담까지 유포되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정부에 대한 신뢰가 거의 땅에 떨어졌다고 봐도 될거 같다.
그러는 동안 일터에서의 안전을 보장해달라는 의료인들의 시위는 인도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시위는 평화로웠다. 하지만, 인도의 독립기념일을 하루 앞둔 8월 14일 밤 콜카타에서의 시위는 갑자기 폭력적인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수십명의 남성이 알지카르 병원에 나타나 난데없이 병원 집기를 때려부수기 시작한 것이다. 시위 중이던 의료인들과 지지자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가기에 바빴다. TMC당은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BJP당의 사주를 받은 폭력 조직의 소행이라고 주장했고, BJP당은 병원과 TMC당의 유착관계를 숨기기 위해 TMC당이 고용한 폭력조직이라고 주장했다.
[# 4] 진정한 범인은 누구일까?
8월 15일 독립 기념식에서 나렌드라 모디 총리는 ‘여성들에게도 안전한 나라’가 필요하다며 유체이탈식 발언을 했다. 잊을만 하면 여성에 대한 끔찍한 성폭행 사건이 벌어지고 모디 총리가 이를 개탄하는 연설을 반복하는 루틴은 10년도 넘게 계속되고 있지만 딱히 개선되는 점은 없다. 오히려 모디 총리의 발언을 일종의 신호로 해석한 웨스트 벵골주의 BJP당원들과 지지자들은 이 모든 혼란상이 TMC당 소속 주지사인 마마타 바네르지의 탓이라며 주지사 퇴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산딥 고쉬 병원장과 TMC당과의 유착관계 여부, 수련의 성폭행 사건에 추가로 연루된 인물 유무 등등 각종 의혹을 엄중히 조사하고 관련자를 처벌해야 할 바네르지 주지사는 엉뚱하게도 가해자를 사형에 처하라고 주장하는 시위에 합류하기 위해 길거리로 나섰다. 책임을 져야하는 의사결정자의 모습이 아니라 ‘항의하는 길거리 위의 투사’ 이미지를 만들어 내기 위한 얕은 정치적 술수였다.
껄끄러운 야당 인사인 마마타 바네르지에게 흠집을 내기 위해 BJP당도 혈안이 되어 있다. 그녀의 책임을 묻는 BJP당 인사들의 공격도 쉬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그 동안 웨스트 벵골의 주요 도시에서는 시위가 끊이지 않으면서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거센 퇴진 요구에 직면한 바네르지 주지사도 모디 총리를 직접 겨냥한 저주에 가까운 발언을 날리며 반격에 나섰다. ‘모디 총리.. 당신은 지금 웨스트 벵골에 불을 지르려 하는 것인가? 웨스트 벵골이 불길에 휩싸인다면 인도 전역이 불길에 휩싸일거다. 델리도 그 불길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제 아무리 BJP당과 TMC당이 으르렁거리는 정치적 라이벌이라 해도 이건 정말 도가 넘은 발언이라고 할 수 밖에 없었다. BJP당의 주요 인사들은 모두다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바네르지의 자극적 발언을 성토하기 시작했다. 결국 성폭행 사건에 정치인들이 끼어들면서 여러 가지가 사라져 버렸다. 피해자 가족들이 뉴스에서 사라졌고, 재발 방지대책에 대한 논의도 사라졌다. 여성들이 직장에서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한 건설적 논의도 모조리 ‘정치 쓰나미’에 휩쓸려서 사라져 버렸다.
자. 이번 성폭행 사건의 진정한 범인은 누구일까? 건달에 가정폭력범이며 동시에 경찰사칭범인 산제이 로이일까? 온갖 추악한 범죄행위를 저지르며 종합병원을 사유화하고 안전조치를 등한시한 산딥 고쉬 병원장일까? 이러한 유력 인사들로부터 뇌물을 받아먹으면서 비가오나 눈이오나 비호해준 바네르지 주지사를 포함한 TMC당 소속 토착 정치세력들이 진짜 범인일까? 그렇지 않다면 이 정신없는 죽음의 광시곡을 가능케한 인도의 부패한 현실이 숨어있는 진짜 범인일까?
글을 마치기 전에 조금은 다른 각도에서 진짜 범인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를 짧게 덧붙이고 싶다. 인도인들 스스로도 인정하듯 인도의 남성들은 여성을 딱 2가지 부류로만 바라본다. 숭배의 대상(힌두 신화에는 여신들이 많이 등장한다)이거나 아니면 성적 대상 이렇게 딱 두 부류 말이다.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갖고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같이 살아가는 ‘동료로서의 여성’이라는 인식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슬람교를 제외하고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율, 하루에도 수십건씩 발생하는 여성 대상 성범죄... 결국 이 모든 것의 뒤에 숨은 진정한 범인은 남성과 여성을 차별하는 인도 특유의 왜곡된 여성관이 아닐까? 이런 차별적이고 전근대적인 인식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제2, 제3의 콜카타 수련의 사건은 계속될 거라는 우울한 생각을 떨칠 수 없다. ///
* 이 글은 일부 편집을 거쳐 딴지일보에도 게재되었습니다.
https://www.ddanzi.com/ddanziNews/8191244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