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날 적부터 삼촌은 우리 집에 함께 살았다.
"삼촌! 라면 끓여줘!"
"그럼, 김치 넣는다?"
"싫어!! 김치 넣으면 맛없단 말이야."
"그럼 네가 끓이던지"
"에잇,,"
결국 씩씩대며 김치가 들어간 라면을 먹었다.
아무래도 나와 삼촌의 음식취향은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삼촌이 늘 사 오는 과자는 뽀빠이와 야채크래커였기 때문이다. 뽀빠이는 별사탕이라도 골라먹을 수 있었지만 야채크래커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맛이었다. 내가 야채크래커를 손댔다는 건 정말 배고파서 먹을 게 없었다는 뜻이었다.
음식 취향은 맞지 않았으나 삼촌과 함께 사는 건 의미 있는 일이었다. 삼촌 방은 나의 안식처였다. '공부해'라는 할아버지와 아빠의 잔소리를 피할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한 성깔 하는 할아버지와 아빠와는 다르게 삼촌은 화를 낸 적 없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뽀빠이 과자에서 별사탕만 훔쳐가는 조카에게 잔소리 한 번 하지 않은 걸 보면.
삼촌은 중요한 때에 필요한 선물을 해주셨다. 월급날엔 늘 장난감 선물을 들고 왔고, 힘든 집안 형편을 눈치보며 축구화 가지고 싶다고 말도 못꺼내던 나에게 새 축구화를 선사했다. 스물이 되던 날 내 몸에 꼭 맞는 정장을 맞춰주기도 했다. 이젠 몸에 꽉 끼는 정장을 10년이 넘도록 간직하고 있다.
삼촌은 12년을 함께 살고 결혼했다. 곧 스물을 바라보는 아들도 있다. 나도 그만큼 나이를 먹었다. 이젠 김치 넣은 라면도 잘 먹는데... 야채크래커 맛은 아직도 잘 모르겠다.(야채크래커 사장님 죄송합니다.) 어릴 땐 술 먹은 다음 날 하루 종일 누워 있었던 삼촌을, 종종 할아버지에게 아픈 잔소리를 듣던 삼촌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느새 똑같은 모습으로 숙취를 앓고 있는 날 보며 그때 그 시절의 삼촌에게 공감을 표한다.
결혼도 했으니 '작은 아빠'라고 부르는 게 맞지만 나는 여전히 '삼촌'이라고 부르는 게 좋다. '삼촌'이라는 글자 안에는 삼촌과의 모든 추억이 담겨있으니까.
글을 쓰다 보니, 삼촌이 끓여준 김치라면이 생각난다.
아직, 감히 흉내낼 수 없는 바로 그 맛!
나의 인생라면
2021. 02. 04.에 내린 글을 재구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