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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잠할 때'와 '말할 때'

- '낄끼빠빠'의 미학(?): 전도서 3:7, 如履薄氷

by 콜랑

'잠잠할 때'와 '말할 때'를 구별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낄끼빠빠'라고 하면 어감상 덜 어려워 보일지 모르겠으나 역시 어려운 일이다. '말'이라는 게 '소통'이고 '소통'이라 함은 둘 이상의 참여자를 전제로 하기에, 주거니 받거니 말을 함에 있어서도 서로의 품위를 고려하는 기술은 배워야 할 능력이며 미덕이다.


보다 높은 경지(?)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능력을 메타적으로 활용하면 보다 더 아름다워 보인다. 나와 상대가 입장은 다르더라도 동일한 사회나 조직의 구성원인 경우에는 상대방을 꺾어야만 할 경우라도 나와 상대가 속한 집단의 품격을 고려하여 자제하는 소통 방식이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메타적 낄끼빠빠' 역시 미덕일 것이다.


비록 그게 내 직업적 의무이자 소명이라고 하더라도 나와 상대의 품위를 동시에 훼손시키면서까지 굳이 드러낼 필요가 없는 허물을 드러내는 건 당위일까 야비함일까? 개인 간에도 상대의 허물을 덮어주면 아량이고 배려인 것을...


나와 우리의 품격을 의식하는 소통의 미학이 때로는 윤리 의식과 갈등을 겪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요즈음이다. 우리 사회에는 이런 갈등을 예방할 수 있을 정도로 세련된 낄끼빠빠의 미학이 현현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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