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삶
엄마는 참 아름다운 사람이다. 일단 외형적인 아름다움이 눈에 띄는 사람이다. 이모가 미스코리아에 출전하신 경력이 있으신 만큼 엄마의 외적 아름다움은 꽤나 객관적인 아름다움이다. 학창 시절 학부모 모임을 보면, 항상 엄마가 눈에 띄었다. 옷을 입으시는 센스도 좋으셔서 항상 아주머니들 사이에 있으면 어울리지 않은 젊은 여성이 앉아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찌나 젊어 보이셨는지 내가 저학년일 때는 엄마가 젊다고 생각하고 더 어리신 학부형들이 엄마를 나이로 누르려고 하셨을 정도이니 말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엄마는 손에 물 한방울 묻히지 않은, 고생이라고는 해보지 않은 온실 속의 딸기와도 같은 사람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엄마의 삶은 외형만큼 평탄하지 않았다.
어려워진 집안의 장녀로서 3명의 동생들을 거둬서 챙기고, 완도 금일도라는 작은 섬에서 광주로 유학까지 가서 사범대학교를 졸업하실 정도로 부지런하고 생활력이 강하셨다. 졸업하신 이후에는 곧바로 돈을 버셔야 했기에 서울로 상경하셔서 학원 강사로 오랜 기간 일을 하셨다. 집안이 어려웠지만, 엄마는 엄마의 노력으로 이를 극복하고 자신의 삶을 개척해나가셨다. 푸근한 곰 같은 우리 아빠를 만나 결혼을 하시고, 누나와 나를 차례대로 낳고 화목한 가정을 꾸려나가며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셨다고 한다.
누나는 유년 시절 정말 활동적인 아이였다. 호기심이 많고, 붙임성이 좋아 엄마 품보다는 새로 만난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귀여움을 뽐내며 이쁨을 받던 아이였다. 그 호기심이 많던 맑은 눈의 4살 아이는 여느 날과 다를 것 없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호텔 계단 난간에 기대어서 아랫층 로비의 신기한 전등들을 지켜보았고, 4층 높이에서 추락했다. 아이는 그 이후 장애를 입은 채로 평생을 살아가게 되었다. 이는 우리 가족 모두에게 비가역적인 슬픔이었다. 평생을 자신의 노력으로 인생을 개척해온 엄마에게 가장 큰 고난이셨을 것이다. 노력을 통해서 눈 앞의 난관들을 언제나 하나씩 헤쳐 나가오신 엄마였다. 하지만, 극복하기에 누나의 장애는 되돌릴 수 없는 벽과도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누나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또한, 장애인이 있는 가정에서 생길 수 있는 가정불화와 같은 문제들도 차근차근 풀어나가셨다. 누나를 어떻게든 호전시켜보시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셨고, 살아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했던 누나는 그렇게 아직도 우리의 곁에 있다. 20년이 넘는 세월을 엄마는 누나를 보살피시며 살아오셨다.
장애가 있는 가족 구성원이 있을 때 이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불행하다고 느끼지 않고, 우리는 행복하다고,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우리 가족도 그 시간이 짧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과정 속에서 지금의 위치에 오기까지 엄마의 희생이 있었다. 엄마는 이제 어엿한 공인중개사 사무소 소장이 되셔서 제2의 인생을 개척해나가시는 중이다. 엄마가 개척해나갈 행복이 앞에 펼쳐져 있어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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