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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인 Oct 12. 2023

때론 무계획이 처방전

논문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때였다. 비슷한 시기에 안방 남자도 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나보다 그이의 스트레스가 부풀어 터지기 직전일 때쯤 그는 내게 여행을 제안했다. 당장 벌인 일 때문에 해외는 못 가지만 비행기 타고 여행 느낌을 내자며 그날 밤비행기로 제주도에 도착했다.


평소 같았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남편의 계획대로, 예약까지 풀 세팅되어야지만이 여행을 갔었는데 이번은 그러지 않기로 했다. 남편과 나 둘 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먹고 싶은 음식도, 가고 싶은 장소도 그날의 느낌 따라 정하기로 했다.


비행기 티켓도 당일, 숙소도 그 당일에 바로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이렇게 편한데 그동안은 뭐가 그리 불안해서 밥 먹는 식당 하나하나 예약을 했는지. 예약도 미리 걱정의 결과물이 아니었을까, 호텔에 짐을 풀며 문득 생각한다.


여행 중 하루는 비가 많이 와서 괘슴츠레한 날씨였다. 몸 컨디션도 그렇고 옷도 제대로 챙겨 오지 못해 그날은 숙소에서만 머물렀다. 안에 있는 시간이 아까울 줄만 알았는데 생각 이상으로 좋았다. 다행히 아무 데도 예약하지 않은 덕분에 온전히 쉴 수 있었다. 여행을 와서도 꼭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것도 어쩌면 편견이었는지 모른다.


집에서 쉴 땐 쉬고 있어도 머릿속엔 늘 할 일로 가득 찼다. 일상과 다른 곳에서의 휴식은 내가 하지 못했던 생각의 물꼬가 트였다. 여행에서의 휴식은 평소의 뇌 휴식도 포함했던 거였다. 집이었다면 못했을 생각이, 계획대로 어딘가에 가 있었다면 하지 못할 생각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그날을 채웠다.


유독 예전에 하고 싶은 일들이 떠올랐다. 지금도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며 살고 있지만 내가 잘할 수 있는 영역의 현실과 타협한 부분이 다소 있었다. 과거에 하고 싶었던 일들이 자기들을 그새 잊었냐며 내가 쉬고 있는 틈을 타 서운한 마음을 내비쳤다. 아, 내가 이걸 하고 싶어 했었지, 그동안 재능 부족이라고 피하기만 했던 일들이었다.


그깟 실력 좀 부족하면 어때서 나 자신을 채찍질했을까. 여행지에서의 마음은 너그러워진다. 애초에 그 분야 재능이 없으니 1등 못하는 거 즐기면 되지 않을까? 1등은 1등을 지켜야 하니까 무지하게 힘들 거야. 2등도 1등 쫓아가려면 힘들 거고, 그렇다면 나는 누구보다 진정 밑바닥에서 즐기면서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동안 애매해서 제출하지 못했던 답안지에 답을 써낼 수 있을 것 같다.


과거엔 잘하지 못할 것 같으니 그냥 포기했던 일들이 웬일로 못해도 그냥 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평가에 상관없이 나대로 하면 되지 않을까. 아직도 '까'로 끝나는 마음에 확신이 서지 않고 의문이 들지만 궂은 제주의 날씨에서 무지개를 보았다.


어쩌면 꼭 가야 한다는 명소, 맛집을 위해 철저하게 세운 여행 계획에선 진짜 내가 좋아할 만한, 또는 내게 맞는 것들을 놓칠 수도 있는 일이다. 내가 세운 인생 계획이 정말 나를 위한 것인지, 1등을 못할 바에 적당히 현실과 타협한 일은 아닌지, 아무 계획 없는 여행에서 나를 던져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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