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 이후
지금도 제주를 찾는 많은 사람이 "4.3이 뭐냐?"라고 묻지. 그것은 비극의 상징 4.3을 캄캄한 동굴에 너무나 오랫동안 버려두었던 탓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한국 현대사에서 이 역사의 이름이 낯설기만 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어찌 잊겠느냐. 다만 농사짓고, 고기 잡으며 살던 사람들, 부모, 자식이, 사랑하는 사람이 눈앞에서 죽어도 슬퍼할 자유가 없던 사람들을. 어찌 잊겠느냐. 죄 없는 것이 죄였던 사람들, 이름자가 같다는 이유로 감옥에 가고, 행방불명된 사람들을. 다만 그 시국을 만났던 죄로 죽어갔던 사람들을.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자식들을 기다리다 죽어간 어머니의 어머니들을 어찌 잊겠느냐. 잊어선 안 되는 것, 이것이 산 자인 우리가 너무나 억울하게 죽어간,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느냐.
제주 4.3을 묻는 너에게 / 허영선 지음
4박 5일의 답사가 끝났다. 답사의 끝은 이야기의 시작을 예고하고 있었다. 눈을 뜨자마자 공항으로 향했다. 몇 번이나 잘못 탄 버스는 마치 조금 더 오래 제주에 머무르고 싶은 내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1시간이면 도착할 공항을 2시간이 걸려 도착했다. 날은 올 때처럼 무더웠으나 짜증이 일거나 조급증이 생기지는 않았다.
돌아온 집은 며칠 비운 티도 나지 않게 그대로였고, 여덟 살 난 아들은 문 앞에서 지친 내 몸을 꼭 끌어안아 주었다. 살아있는 몸, 아직 덜 자란 아이의 살냄새, 규칙적인 심장박동, 그런 것들이 나를 그만 서럽게 했다.
아이를 낳고 난 후로 동화를 쓰는 것이 쉽지 않았다. 나는 늘 내 동화 속의 주인공들을 가혹한 현실로 떠미는 사람이었고, 현실을 헤쳐 결말에 닿은 주인공에게 어떤 선물도 준비해놓지 않는 메마른 작가였기 때문이다. 내 동화 속의 주인공들은 차가운 현실의 벽 앞에 몸을 웅크리거나, 깊은 병에 든 채 결말을 맞았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주인공에게 그런 마지막을 선사하는 것에 어떤 죄책감도 없었다. 동화 속의 어린아이는 나의 내면 아이에 가까웠고, 나는 나를 홀대하는 것에 익숙했으니까.
그래서 아이를 낳고 난 뒤에는 동화를 쓰는 것이 힘들었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살아 숨 쉬는 아이를 연상하게 했고, 나는 내 가장 소중한 존재에게 잔혹하고 야멸찬 결말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아직 삶의 어떤 부분에 대해서도 해답을 얻지 못한 채로 동화 속의 주인공들에게 멋진 해답과 결말을 선물할 자신이 없었다.
'노래가 흐르는 바다'는 아이를 낳은 후에 의인화되지 않은 주인공이 등장하는 첫 번째 동화다. 가장 소중하게 다루고 싶은 주인공에게 소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작은 사람이기도, 소리 그 자체이기도, 누군가의 애틋한 목소리이기도 한 소이.
소이는 작은 해녀 마을 무명포에 살고 있다. 오래전 그곳의 해녀들은 바다에서 노래를 부르며 서로를 기억했다. 하지만 검은 구두를 신은 사내들이 마을을 휩쓸고 지나간 어느 날 이후, 무명포 해녀들에게 노래는 '위험하고 불온한 것'으로 바뀐다. 소이는 모든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고 난 이후에 태어난 소녀다. 어리지만 마을에서 그 누구보다 깊이 잠수할 수 있는 '상군 해녀'다. 한 번도 닿은 적 없는 깊은 바다 끝에 다다랐을 때 소이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 답사기가 끝나면 본격적인 집필에 들어갈 계획이다. 긴 작업이 될 것이다. 구상을 마쳤고, 결말도 정했다. 첫 문장을 쓰고 나면 파도가 이 이야기를 싣고 가겠지. 소이가 많은 이들에게 오랫동안 기억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 동화를 쓸 수 있다니 다행이다. 잊히지 않는 이야기가 된다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잊더라도 나는 소이를 기억할 것이다. 이야기를 짓기 전에 소이를 먼저 마음에 새겨둔다.
「노래가 흐르는 바다」 프로젝트는 제주 4.3 사건과 여성의 기억을 모티프로 한 창작 동화 작업입니다. 동화의 본편은 추후 공개 예정이며, 현재는 자료 조사와 여행, 인터뷰, 글쓰기 준비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해당 작업은 2025년 경기문화재단 청년예술인 자립준비금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지원받은 시간과 자원이 헛되지 않도록 정직하게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