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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선미 Apr 23. 2022

슬픔이 남편을 장악하다

지난겨울에 생긴 일

  남편과 여동생의 사이에는 작은 틈도 없어 보인다. 그 사이엔 아내인 내가 들어갈 수 없는 촘촘하고 견고한 막이 있는 듯하다. 난 가끔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남편과 다투는 날이면 어김없이 남편에게 난 네 동생이 아니니 그렇게 깊은 이해를 기대하지 말라라던가, 집에 가서 동생에게 물어보라라던가, 네 동생하고 가서 영원히 잘 살라고 악담 아닌 악담을 하게 된다. 악담 일지 호담 일지 누가 알겠는가마는 그런 말들에 돋친 가시를 금세 알아채고 남편은 움찔하곤 한다. 난 남편이 시시콜콜 모든 것을 시누와 상의하고, 우리 사이의 시시껍절한 일조차 시누가 알게 할 땐 머리끝까지 화가 뻗치곤 한다. 


  남편보다 두 살이 어린 시누는 전신 근육이 마비되는 병으로 몸이 불편하다. 불편도 많이 불편해서 시누 얘기를 할 때면 사람들은 좀 당황하기도 하고 좀 언짢아하기도 한다. 그런 시누를 집안 식구들이 모두 협업하여 돌보고 배려해서 시누는 비교적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다. 시누의 상황은 나아질 수가 없는 것이니 모두들 그의 의견을 가장 앞에 두고 최우선으로 배려하며 살고 있다. 그리하여 나의 이런 언짢은 심사도 쉽게 바깥으로 내놓을 수 없는 사정이다. 


  어제는 시댁에서 만두를 빚었다. 이번 주 토요일이 남편의 생일인데 아직 백신을 맞지 않은 남편과 시누 때문에 식당에서 함께 저녁을 먹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단 코로나 발생 이후 벌이가 없어진 남편에게 생일 식사 비용도 적지 않을 것 같기에 모두들 집에서 하기로 동의했기 때문이란 말이 더 맞다. 남편이 그렇게 사랑하던 라자냐보다 만두 샤부샤부가 더 좋다고 하니 만두를 빚을 수밖에. 그래서 만두를 빚으러 시댁에 갔다. 


  시댁은 마침 시누가 이제 2개월 된 흰색 말티푸를 입양해서 어수선했다. 시누는 강아지에게 빌리라는 이름을 지어줬는데 빌리는 작은 쌀벌레처럼 하얗고, 꼼지락거리며 세상에 자기를 싫어할 사람이 있을 수 없다는 듯한 태도로 잘 적응하고 있었다. 특히 남편은 빌리를 선보러 가는 곳까지 따라갈 정도로 빌리가 온 것에 기뻐한다. 종종 불안감을 호소하는 시누의 정서안정에 작은 강아지만 한 게 없을 거라는 게 남편의 생각이었고 나 역시 같은 생각이다.

  

  아직 어린 빌리는 소변을 잘 조절하지 못하고 자주 바닥에 오줌을 눈다. 그래서 시댁 바닥은 빌리가 지나간 곳마다 동전만 한 오줌이 고여있다. 수시로 싸 대는 오줌을 치우느라 커다란 둥치의 키친타월이 모자랄 지경이다. 시댁에서는 강아지를 처음 길러보는 지라 다들 힘들어하는 것이 역력하게 보인다. 귀여움보다는 여기저기 소변의 불결함과 어디든 반갑다고 핥아대는 데에 낯섦이 더 큰 거 같고, 꼬리를 흔들며 과하게 사람마다 따라다니며 수선을 떠는 빌리가 영 어색한 모양새다. 


  남편이 왔다. 언제나처럼 그의 등장은 요란하다. 빌리를 외쳐대는 그의 출현에 현관이 들썩거린다. 빌리는 용수철을 삼킨 쌀벌레처럼 열광적으로 남편을 맞아주고 남편도 빌리를 반갑게 대해 준다. 작은 빌리의 몸은 머리부터 꼬리까지 하얀 막대가 되어 오른쪽으로 굽은 C자가 되었다가 왼쪽으로 굽은 C가 되기를 반복한다. 남편은 빌리가 오줌을 질질 싸도 그저 쓱 치우고 말뿐 어린 빌리를 아주 잘 돌본다. 남편의 이렇게 자상한 모습이 의외다. 빌리는 팍팍한 카스텔라 사이를 부드럽게 만들어 주는 생크림과 시럽처럼 집안을 말랑하게 녹여주고 있었다. 


  잠시 후 외출했던 시누가 돌아오자 빌리는 다시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든다. 시누의 휠체어 위에 발을 얹고 꼬리를 냅다 휘두른다. 작은 혀를 움직여 열심히 핥아주고 그의 기쁨을 표시한다. 그 작은 몸 어디에 이만큼의 에너지를 담아 두었는지 신기할 정도다. 행복감에 겨운 강아지는 집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식구들은 행여 발로 다치게 할까 봐, 오줌을 밟을까 봐 노심초사하며 움직인다. 주방을 차지하고 만두를 빚는 나는 이 모든 광경이 코믹하게 느껴져 혼자 비실비실 웃는다. 그런데 아주 잠깐 동안이지만 난 시누의 태도가 좀 수상하다고 여겨졌다. 그토록 원했던 작은 강아지였는데 왜 그런지 빌리를 대하는 태도에 냉랭함이 느껴졌다. 빌리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찰나의 시간에 고민한다, 어린 강아지는 금세 잊고 다시 즐거워진다.  시누의 태도는 모두에게 낯설다. 동물의 털에 알레르기가 있는 시어머니조차 빌리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는데 시누에게 심경의 변화가 온 것이다. 빌리가 고민을 했던 짧은 시간만큼 어색함이 집안에 퍼진다.


  남편은 데려온 강아지를 그렇게 쉽게 이틀 만에 남에게 줄 생각을 하는 시누에게 대단히 실망을 했다. 남편의 새로운 면을 또 본다. 우리는 고양이 두 마리를 입양해서 기르고 있는데 남편에게 고양이들은 새로운 세상을 열어준 귀한 녀석들이다. 그는 고양이가 싼 오줌, 똥, 토사물까지도 불만 없이 다 치워주고, 고양이들의 안정적인 삶을 위해 겨울에도 창문을 열어두고 잔다. 그런 그에게 단 이틀 만에 빌리를 파양 하려 한다는 시누의 행동은 아주 폭력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아무리 동생이라 해도, 아무리 모든 것에 임뮤니티를 행사할 수 있는 그녀라고 해도 남편은 받아들이기 힘든 모양이다. 모든 것을 공유하고 모든 것을 상의하던 그래서 믿음도 컸던 시누가 강아지에 대해서 무책임하고 변덕스러운 태도를 보이자 더 이상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다. 


  저녁을 먹는 일상적인 풍경 속에 어색함과 서먹함이 슬그머니 들어와서 자리를 차지한다. 남편은 그렇게 좋아하는 만두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숟가락을 놓자마자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자 한다. 우리 집까지 오는 데 걸리는 시간은 10분, 그는 오는 내내 자기가 동생에게 느끼는 실망감과, 그렇게도 원하던 강아지를 차갑게 대하는 데서 오는 충격을 '너는 절대로 알 수 없을 거야'라며 성토한다. 일정 부분은 나도 이해하는 지라 함께 시누를 성토한다. 시누는 무책임하다. 이기적이다. 아니 너무 많은 책임 면제권을 가지고 있다. 몸이 불편하다고 해서 수십 년을 면제받은 책임이 이젠 주변 사람들이 감당하기 힘든 정도에까지 이른 것이다.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남편은 한동안 자기 집에 가지 않겠노라 한다. 강아지를 파양 한다면 말이다. 그런 일은 없기를 바란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남편의 충격과 슬픔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커서 밤에 잠도 잘 못 잔다. 동생에 대한 실망과 거기에서 오는 슬픔에 장악된 거다. 이제 나는 조금 이해한다. 슬픔의 정체에 대해. 어린아이가 슈퍼마켓에서 장난감을 사주지 않는다며 발을 구르며 슬피 울 때, 이제 어른이 된 우리가 그 아이를 사랑스럽게 쳐다볼 수 있는 건 그 슬픔에 대해 알기 때문이다. 중년의 남자가 동생에 대한 신뢰와 가치를 잃었을 때 느끼는 그 슬픔도 나는 짐작할 수 있기에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옆에 있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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