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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2] 가상자산의 불편한 진실

규제 차익과 지정학적 게임의 현실

by 법의 풍경

최근 제가 “21세기 가치론의 패러다임 전환”이라는 거창한 제목으로 가상자산 논쟁을 다뤘는데, 한 금융전문가(겸 AI퀀트)로부터 날카로운 현실 점검(reality check)을 받았습니다. 철학/기술의 낭만을 잠시 접고 규제 차익(regulatory arbitrage)과 지적학의 렌즈로 불편하지만 더 현실적인 진실을 들여다보겠습니다.


(p.s. 제 지난 이야기가 하늘에서 날아다녔다면 그 전문가 분의 문자 메시지 몇 개를 받고 나서 강제로 땅으로 끄집어 내려진 느낌을 받았습니다.)


지난 글:


가상자산 시장은 본질적으로
규제 차익(regulatory arbitrage)으로
성장한 시장이다.


문자 메시지에 있는 이 한 문장이 저의 현실감각을 다시 일깨우네요. 제가 그 문자 메시지 몇 개를 정확히 이해했는지 모르겠지만 공부한 바를 적어봅니다. 따라서 아래 글은 제 생각이라기보다 그분의 생각을 제가 공부한 내용입니다. 일단 오늘 공부했으니 내일은 이걸 다시 반박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가상자산 가치의 진짜 원천: 3단계 피라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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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한 기술 혁신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고, 실제로 사람들이 왜 가상자산을 사용하는지 냉정하게 살펴보겠습니다.


1단계: 돈세탁 (Money Laundering)

가장 기본적이고 강력한 수요층입니다. 불법자금이나 세금을 회피하려는 자금이 ‘깨끗한’ 돈으로 변신하는 통로로 사용됩니다.

쉬운 비유: 도둑이 훔친 금괴를 그대로 팔면 들키니까, 금괴를 녹여서 목걸이로 만들어 파는 것과 같습니다. 비트코인은 이런 ‘금괴 용광로’ 역할을 합니다.

구체적 사례들:

중국 갑부들의 자본 도피 (중국 정부의 자본 통제 회피)

각종 범죄 수익의 자금 세탁

상속세, 증여세 회피

제재 국가들의 무역 대금, 불법 무역 결제



2단계: 도박장 (Casino)

전통적인 주식시장보다 훨씬 높은 변동성을 가진 투기 수단으로 활용됩니다.

쉬운 비유: 강원랜드에서는 하루 몇십만 원만 잃지만, 가상자산 시장에서는 하루에 몇억씩 따거나 잃을 수 있는 ‘무제한 카지노’입니다.

<개념박스: 변동성(Volatility)>

가격이 얼마나 심하게 오르내리느냐를 나타내는 지표입니다. 예를 들어:
- 은행 예금: 변동성 거의 0% (안전하지만 재미없음)
- 주식: 연 20-30% 변동성 (적당한 스릴)
- 비트코인: 연 80-100% 변동성 (극한의 스릴)
(레버리지 결합 시 위험과 쾌감 증폭)



3단계: 가치 저장수단 (Store of Value)

1단계와 2단계 수요로 가격이 형성된 후, 부수적으로 인플레이션 헤지/분산투자 수단으로 활용됩니다.

쉬운 비유: 처음에는 도박장이었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이 와서 그 옆에 호텔도 짓고 쇼핑몰도 만든 ‘라스베이거스’ 같은 상황입니다.



2. 미국의 전략적 계산: 스테이블코인 제도화의 진짜 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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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행정부가 스테이블코인 제도화에 적극적인 이유를 지정학적 관점에서 분석해 보겠습니다.


(1) “착한 돈세탁”은 환영, “나쁜 돈세탁”은 차단


미국의 전략은 매우 영리합니다. 자국에게 도움이 되는 자본 도피는 양성화하되, 위협이 되는 돈세탁은 막겠다는 것입니다.


<개념박스: 스테이블코인>

달러나 원화 같은 기존 화폐에 가치가 고정된 암호화폐입니다. 1달러 스테이블코인은 항상 1달러 가치를 유지하도록 설계되어 있어 가격 변동성이 거의 없습니다. 마치 ‘디지털 달러’라고 생각하면 쉽습니다.


- 미국이 환영하는 “착한 돈세탁”:


① 중국 자본 도피

시나리오: 중국 갑부 김 씨가 중국 정부 몰래 100억 원을 미국으로 빼돌리고 싶어 합니다.
기존 방법: 중국→홍콩→싱가포르→미국 (복잡하고 추적 가능)

스테이블코인 방법: 중국에서 달러 스테이블코인 구매 → 미국에서 달러로 환전 (간단하고 추적 어려움)

미국 입장: “어서 오세요! 그 돈으로 우리 부동산이나 국채 사세요!”


② 남미 달러화

시나리오: 아르헨티나 주민이 자국 통화(페소) 대신 달러로 저축하고 싶어 합니다.

기존 방법: 미국 은행 계좌 개설 (거의 불가능)

스테이블코인 방법: 달러 스테이블코인으로 저축 (쉽고 간단)

미국 입장: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들이 우리 국채를 사니까 Win-Win!”


- 미국이 차단하는 “나쁜 돈세탁”:

북한, 이란 등 제재 국가 자금

테러 조직 자금

마약 거래 수익



(2) 불가능한 삼각정리의 정치경제학


<개념박스: 불가능한 삼각정리>

한 나라는 다음 세 가지 중 최대 2개만 선택 가능합니다:
- 자유로운 자본 이동: 돈이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것
- 독립적 통화 정책: 자국 상황에 맞게 금리를 조절하는 것
- 고정 환율제: 환율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

마치 “맛있고, 저렴하고, 건강한” 음식은 없는 것처럼, 경제정책에서도 모든 걸 다 가질 수는 없다는 원리입니다(상세는 이 글 말미에 설명).


미국의 메시지: “우리와 교역하고 싶으면 자본 통제(Capital Controls)를 포기하라”


쉬운 비유:

동네 큰 형님이 “우리랑 놀려면 네 주머니도 열어둬라. 네가 가진 돈을 마음대로 쓰고 빼갈 수 있어야 진짜 우리 편이지”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즉, 동네 질서(세계 경제 질서)에 들어오려면 네 재산(자본)을 스스로 묶어두지 말고, 자유롭게 쓰이도록 풀어놔라는 압박이죠.

곧, 미국이 다른 나라들과 자유무역과 금융거래를 확대하려면, 상대국이 ‘자본 이동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압박을 뜻합니다. 즉, 외국 기업과 투자자들이 마음대로 들어오고 나갈 수 있어야 교역과 투자가 활발히 이루어진다는 논리입니다.


즉, 미국은 교역 파트너에게 자본 자유화를 전제로 한 글로벌 질서 참여를 요구해 왔고, 이는 곧 상대국이 “환율을 고정하면서도 독립적 통화정책을 쓰는” 방식(즉, 폐쇄적인 시스템)을 포기하라는 압박이 됩니다.


(3) 왜 이런 메시지를 주었을까?


가. 미국 자본의 해외 진출 보장


자본 통제가 있으면 외국 자본이 들어가고 나오기가 어렵습니다. 미국은 세계 최대 자본 수출국이므로, 자본 이동 자유는 곧 미국 금융·기업 이익을 위한 기반입니다.


나. 달러 중심 질서 강화


자본 자유화는 달러가 국제 거래와 금융의 기본 통화로 자리 잡는 데 유리합니다. 상대국이 자본을 묶어두면 달러 유통과 달러 기반 금융이 위축되므로, 미국은 이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다. 정치경제적 지렛대 확보


자본이 자유롭게 흐르는 상황에서는, 금융시장의 압력이 곧 정치경제적 압박 수단이 됩니다. 미국은 이를 통해 다른 나라 정책을 간접적으로 제약할 수 있습니다.



3. 비트코인의 암울한 미래: 스테이블코인의 역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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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비트코인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스테이블코인이 제도화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수요 이탈의 시나리오>

1단계: 착한 돈세탁 시장 상실

중국 갑부들: 스테이블코인이 더 안전하고 편해 → 비트코인 버림

남미 주민들: 변동성 없는 달러 스테이블코인 선호 → 비트코인 버림


2단계: 나쁜 돈세탁만 남음

북한, 이란 등 제재 회피 목적

테러리스트, 마약상 등 범죄 자금

→ 정부의 집중 단속 대상이 됨


3단계: 가치 저장 수단으로써의 매력도 하락

투기 수요 감소

기관 투자자들의 외면

→ “인플레이션 방어 목적이라면 그냥 S&P 500 사는 게 나음”


쉬운 비유:

뒷골목 환전상이 잘 나가다가 은행에서 정식 환전 서비스를 시작하니까 손님들이 다 그쪽으로 가버린 상황입니다.



4. DeFi의 진짜 정체: 불법자금 운용의 우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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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전 글에서 “금융 혁신의 실험”이라고 했던 DeFi(탈중앙화 금융)도 다시 보니 다른 모습이 보입니다.


DeFi가 만들어진 진짜 이유


<개념박스: DeFi (Decentralized Finance)>

은행 없이 블록체인상에서 이루어지는 금융 서비스입니다. 대출, 예금, 보험 등을 중앙화된 기관 없이 스마트 계약으로 처리합니다. 마치 ‘무인 은행’이라고 생각하면 쉽습니다.

전통적인 문제: 탈세나 범죄로 얻은 가상자산을 현금으로 바꾸려면…

거래소 계좌 필요 → 신원 확인 필요 → 당국에 추적당함


DeFi 솔루션: 현금화 안 하고 그 돈 그대로 굴려서 수익 창출

스테이킹(staking): 가상자산을 네트워크에 예치하고 연이자(APY) 수익

유동성 제공(liquidity providing): 거래소에 코인 쌍(코인+스테이블) 예치하고 거래 수수료 일부 배분(유동성 풀은 두 자산의 균형으로 운영되므로, 일반적으로 변동성 코인 + 스테이블코인 쌍 형태로 예치)

대출: 가상자산을 담보로 맡기고, 필요로 하는 사용자에게 가상자산 빌려줌


즉, 자산을 팔지 않고도 “이자 + 수수료 + 대출 이자”로 수익을 만들 수 있습니다.


쉬운 비유:

훔친 그림을 미술관에 팔면 들키니까, 아예 그 그림으로 개인 갤러리를 차려서 입장료를 받는 것과 같습니다.



5. 규제 차익: 모든 것을 설명하는 마스터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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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가상자산 시장의 성장 동력은 규제 차익(Regulatory Arbitrage)이라는 한 가지로 설명됩니다.


<개념박스: 규제 차익 (Regulatory Arbitrage)>

서로 다른 지역이나 분야의 규제 차이를 이용해서 이익을 얻는 것입니다. 마치 세금이 싼 나라로 본사를 옮기는 것처럼, 규제가 느슨한 영역에서 비즈니스를 하는 전략입니다.


<가상자산 시장의 규제 차익 사례들>


① 지역별 규제 차익

중국: 가상자산 거래 금지 → 해외 거래소 이용

미국: 복잡한 증권법 → 해외에서 토큰 발행 후 역수입


② 업종별 규제 차익

전통 은행: 엄격한 자본 건전성 규제

DeFi: 규제 공백 → 높은 수익률 제공 가능


③ 시간대별 규제 차익

기존 금융: 평일 9–6시만 운영

가상자산: 24시간 365일 거래 가능


현실 체크:

“금융에 대단한 혁신은 없다”는 금융업계 격언이 있습니다. 신용을 적절히 창출하고, 시장 신뢰를 유지하고, 사기를 방지하는 것—이것이 금융의 본질입니다. 나머지는 다 포장입니다.



6. 미래 전망: 규제 공백이 메워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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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가상자산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규제 차익 관점에서 보면 답은 이렇습니다.


(1) 시나리오 1: 점진적 규제 정비 (가장 가능성 높음)


2025–2027년: 미국과 EU의 포괄적 규제 프레임워크 완성

스테이블코인 제도화로 ‘착한’ 수요는 양성화

비트코인 등 변동성 자산은 엄격한 감시 하에 축소


2027–2030년: 규제 차익 기회 급격히 축소

대부분의 주요국에서 일관된 규제 적용

남은 시장은 진짜 투기세력, 범죄자들만의 영역


(2) 시나리오 2: 지정학적 분화 (중간 가능성)

미국 블록: 달러 스테이블코인 중심의 통제된 시스템

중국 블록: 디지털 위안화(CBDC) 중심 시스템

러시아/이란 블록: 제재 회피용 가상자산 지속 활용


(3) 시나리오 3: 기술적 혁신 (낮은 가능성)

규제를 완전히 우회하는 새로운 기술 등장 → 규제 당국과의 끝없는 숨바꼭질 지속



7. 투자자들에게 주는 시사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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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실적인 시사점

① 스테이블코인: 안전하지만 수익률 제한적

미국 단기국채 + 약간의 편의성 프리미엄

규제 리스크는 낮지만, 혁신적 수익은 기대 안 하는 게 좋음


② 비트코인: 규제 차익 축소로 장기 하락 압박

남는 수요: 진짜 범죄자들 + 하드코어 투기꾼들

“인플레이션 헤지 목적이라면 S&P 500이 더 낫다”


③ 알트코인: 대부분 0으로 수렴 예상

규제가 정비되면 실용성 없는 토큰들은 자연도태

살아남는 소수는 실제 사업 모델이 있는 것들뿐



(2) 정부 정책에 대한 시사점

한국 정부의 딜레마:

너무 엄격하면 → 산업 경쟁력 상실

너무 관대하면 → 돈세탁 천국 오명

현실적 해법:

미국의 스테이블코인 제도화 방식 벤치마킹

‘착한’ 혁신은 육성, ‘나쁜’ 투기는 차단

규제 샌드박스로 점진적 실험



8. 결론: 낭만을 버리고 현실을 받아들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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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전 글에서 그려낸 “21세기 가치론의 패러다임 전환”은 아름다운 이상향이었을지 모르지만, 현실은 훨씬 더 냉정하고 계산적인 듯합니다.


가상자산 시장은:

기술 혁신의 결과라기보다

✅ 규제 공백을 노린 차익 게임의 측면이 강함

새로운 화폐 시스템이라기보다

✅ 기존 금융 시스템의 우회로의 성격이 강함

탈중앙화 이상향이라기보다

✅ 중앙화된 권력의 새로운 도구에 불과함


즉, 블록체인은 원래 권력을 분산하려는 탈중앙화의 꿈에서 출발했지만, 현실에서는 반대로 특정 세력이 힘을 더 키우고 있습니다.

거래소 권력 –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바이낸스 같은 중앙화 거래소(CEX) 를 이용합니다. 결국 돈이 몇몇 큰 플랫폼에 집중됩니다.

스테이블코인 권력 – USDC, USDT 같은 코인은 달러와 연결돼 있어, 발행사나 미국 금융 질서가 사실상 통제합니다.

정부 규제 권력 – 코인을 현금으로 바꾸는 입출구(온·오프램프)는 국가가 관리합니다. 결국 정부가 모든 흐름을 쥐게 됩니다.

자본 권력 – 큰 자본을 가진 투자자(“고래”)들은 유동성 풀이나 스테이킹에서 거대한 물량을 맡겨두고 안정적인 이자와 수수료를 챙깁니다. 반면 소액 투자자는 같은 풀에 참여해도 수익은 미미하고, 시장이 흔들릴 때 손실은 똑같이 떠안습니다. 결국 “작은 물고기들은 파도에 휘청이지만, 큰 고래는 잔잔히 이익을 흡수”하는 구조가 됩니다.

그래서 “탈중앙화의 이상향”이라기보다, 중앙화된 권력이 새롭게 코인을 이용하는 도구가 된다는 말이 나오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이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시장경제에서 규제 차익을 노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이런 과정을 통해 금융 시스템도 점진적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중요한 것은 환상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마지막 조언: 가상자산에 투자하든 반대하든, 적어도 그 본질은 정확히 이해하고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기술 혁신이라는 포장지를 벗겨내고 나면, 결국 돈과 권력을 둘러싼 오래된 게임의 새로운 버전일 뿐입니다.


현실적 질문: 여러분은 이런 냉정한 현실을 알고도 가상자산에 투자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다른 자산에 관심을 돌리시겠습니까?



<참고>

불가능한 삼각정리: 왜 세 가지를 동시에 가질 수 없는가


우리는 흔히 경제정책에서 “모든 것을 동시에 얻을 수 있다”는 착각을 한다. 하지만 국제금융의 세계에서만큼은 냉정한 수학의 법칙처럼 작동하는 제약이 있다. 바로 불가능한 삼각정리(Trilemma)다.


한 나라가 꿈꾸는 세 가지 목표―①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 ② 독립적 통화정책, ③ 고정 환율제―는 동시에 가질 수 없고, 최대 두 가지밖에 선택할 수 없다.

왜일까?

그 이유는 단순하다.

돈은 언제나 더 나은 길을 찾아 흐른다.



1. 자유로운 자본 이동과 통화정책의 모순


자본이 자유롭게 오가는 세상에서 한 나라가 금리를 독자적으로 조정한다고 가정해 보자. 금리를 높이면 해외 자본은 더 높은 수익을 좇아 몰려온다. 반대로 금리를 낮추면 자본은 빠져나간다. 이 흐름은 즉각적으로 환율 변동 압력으로 이어진다. 그러니 금리 정책을 자국 상황에 맞춰 자유롭게 쓰려면, 환율은 고정할 수 없고 변동을 허용해야 한다.


예컨대 미국은 이 길을 택했다. 미국은 자본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나라이고, 동시에 독립적인 통화정책을 운영한다. 연준(Fed)은 고용과 물가 상황에 맞춰 금리를 올리고 내린다. 대신 환율은 고정하지 않는다. 달러 가치는 시장에서 끊임없이 출렁이지만, 그것이 미국이 감수하는 대가다.



2. 고정 환율과 통화정책 독립의 모순


반대로 환율을 고정하면서 독립적인 금리 정책까지 쓰고 싶다면? 결국 자본 이동을 막는 방법밖에 없다. 환율이 고정돼 있는데 금리를 자의적으로 조정하면, 해외 자본은 즉각 이동을 시도한다. 그럼 외환시장에서 수요·공급 불균형이 생겨 환율 방어가 불가능해진다. 따라서 이 조합을 택한 나라는 외환통제나 자본유출입 규제를 강화할 수밖에 없다.


중국이 과거에 그랬다. 중국은 오랫동안 위안화 가치를 달러에 고정시키면서도 독립적인 금리 정책을 운영했다. 가능한 이유는 바로 강력한 자본 통제 덕분이었다. 개인이나 기업이 마음대로 외환을 들고나가지 못하도록 장벽을 친 것이다. 하지만 이런 통제는 결국 국제금융 허브가 되는 데 걸림돌이 된다.



3. 자유로운 자본 이동과 고정 환율의 모순


마지막으로, 자본의 자유와 고정환율을 동시에 지키려 하면, 나라가 치러야 할 대가는 통화정책의 포기다. 대표적 사례가 바로 홍콩이다.


홍콩은 1983년부터 미국 달러에 홍콩 달러를 페그(peg) 했다. 제도 이름은 ‘연동환율제(Linked Exchange Rate System)’. 1달러=7.8홍콩달러라는 기준선을 중심으로, 환율은 7.757.85 범위 내에서만 움직일 수 있다. 홍콩 금융관리국(HKMA)이 외환시장에 개입해 환율을 방어하기 때문이다.


이 제도는 국제 금융허브인 홍콩의 신뢰를 지탱하는 기둥이다. 자본이 자유롭게 드나들어도 환율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니, 해외 투자자들은 마음 놓고 돈을 맡길 수 있다. 그러나 대가도 분명하다. 홍콩은 독립적 통화정책을 사실상 포기했다. 홍콩의 금리는 연준(Fed)의 정책금리에 크게 묶여 있다. 미국이 금리를 올리면 홍콩도 따라 올려야 하고, 미국이 내리면 홍콩도 내릴 수밖에 없다.


그 결과 홍콩 경제는 미국 경제의 그림자를 고스란히 안게 된다. 미국이 금리를 급격히 인상할 경우, 홍콩 내 부동산 거품이나 경기 침체에도 불구하고 금리를 억지로 따라 올려야 한다. 반대로 미국이 금리를 낮추면, 홍콩의 자산시장에는 과도한 유동성이 흘러들어와 거품을 키운다. 홍콩이 미국의 금리정책에 ‘운명을 맡긴 셈’인 것이다.



4. 불가능의 의미


결국 불가능한 삼각정리란 이렇게 말한다. 국제 자본이 자유롭게 흐르는 시대에는, 모든 경제정책을 다 가질 수는 없다. 반드시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


• 미국: 자본 자유 + 통화정책 독립 → 변동환율 선택

• 중국(과거): 고정환율 + 통화정책 독립 → 자본 이동 제한

• 홍콩: 자본 자유 + 고정환율 → 통화정책 독립 포기


이 세 가지 선택지는 경제정책의 ‘운명의 삼각형’을 만든다. 결국 한 나라가 어떤 길을 걷느냐는, 단순한 경제학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정체성과 전략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렇게 보면, 불가능한 삼각정리는 단순한 경제 이론이 아니라 세계화 시대에 각 나라가 어떤 대가를 감수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교육적 목적의 개인적 의견이며, 투자 권유나 금융 조언을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모든 투자에는 위험이 따르므로 충분한 검토 후 신중하게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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