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 구언수
노란 포스트잇이 빨간 핫팩이 됐다.
- 저는 두 가지밖에 없어요. 아들 이름이 범모인데 범모의 건강 그리고 일이요. 아, 아내 이름도 써야겠네요.
한번 들으면 저장이 ‘되고야 마는’ 세 명의 이름. 아빠 언수는 아내 훈민과 아들 범모를 쓰고는 포스트잇을 보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 수많은 것 중에 왜 ‘건강’ 이야? - 어머니가 급성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어요. 화장실에서 나오시다가 제가 보는 앞에서요. 제가 23,4살 대학 다닐 때. 3,4년간 화장실을 못 가겠더라고요. 어머니가무서운 게 아니라 죽음을 맞닥뜨린 거죠.
얼마 전부터 그는 라디오 법률상담코너 게스트로 함께하고 있다. 디제이 선배 지인이 진짜 괜찮은 변호사가 있다며 추천을 한 것. 평가에 인색한 세상에서 ‘괜찮은’이라는 수식어도 얻기 어려운데, ‘진짜’까지 붙기가 어디 쉬운가. 지인의 주변에서 전국적으로도 이슈가 된 울산 동구의 한 어린이집 교사가 아이를 폭행한 사건이 일어났고,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뜨드미지근한’ 두 명의 변호사를 거쳤고, 마지막에 ‘자기 일처럼 해주는’, ‘세상에 이런 변호사가 없는’ (지인의 표현이다.) 그를 만나 마무리가 되면서 게스트로 연결이 된 것이다.
두 살 아래의 그와는 금방 친해졌다. 그는 말과 행동에 늘 한 방울의 친절을 머금고 있었다. 차를 건네면 소파에 앉아 있다가도 일어나서 받아 들었고, 전화가 걸려온 그에게 조용하게 통화할 수 있는 디제이룸으로 손짓 안내를 하면 통화를 하면서도 묵례를 잊지 않았다.
한 날은 디제이 선배와 함께 그의 사무실에 들렀다.울산지방법원 근처, 주소마저 ‘법대로’인 그곳에서 촘촘히 들어선 변호사 사무실 중 한 곳. 사무장을 맡고 있는남자직원과 데스크의 여직원, 그의 방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손님맞이용 큰 탁자, 업무를 보는 책상과 그 위에 기다란 모니터와 사각 모니터 두 개, 그 뒤로 울산시, 밀양시 등에서 받은 표창장, 개업 때 받은 것 같은, 죽지 않고 있는 살아남은 게 용해보이는 리본 달린 화분, 큰 일을 해결하고 선물 받았다는, 그 말을 듣고 난 이후부터 비싸 보이는 흰 항아리까지. 한 번도 어질러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흐트러질 일 없을 것 같은 공간이었다. 그중 가장 눈에 띈 건 어울리지 않으면서 어울리는, 책상 옆 안마의자였다. 디제이 선배가 담배로 잠깐 밖으로 나간 사이 그에게 물었다.
- 여기서 쉬는구나. - 한번 앉아보실래요? - 아니 아니. - 저녁에 술자리가 있으면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서 일해야 할 때가 있거든요. 그때 안마의자에 앉았다가 일해요. 아니면 술 먹고 들어와서 부산집까지 가야 하니까 다 깨고 새벽에 차 몰고 가려고 아예 잘 때도 있고요
누군가의 삶의 무게는 위로가 된다.
- 언수야. 3월부터 라디오 개편을 했거든. 11시부터 12시까지 하는 음악프로그램도 내가 하고 있는 거 알지.그게 경제프로그램으로 바뀌었어. 포장은 경제인데 실은 보험이야. 내가 맡은 역할 중 하나는 라디오 듣는 사람들이 보험 상담을 원하면 게스트로 나오는 보험설계사와 연결해 주는 거, ‘전문가님과 연결해 드릴게요.’ 그러니까 본질은 마케팅 동의를 구하는 거야. 속상하고 기분 나쁘지. 보험을 팔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먹고는 살아야 하는데, 계속해야 되는 거 맞나, 하루에도 몇 번을 생각한다.
- 해야죠.
생각한다에서 ‘한’ 까지만 말을 한 것 같은데 그의 답이먼저 나왔다. 술에 취하고 사람에게 기빨린채 다시 일을 하려고 안마의자에 몸을 구겨 넣는 변호사는 또렷하고 단호했다. 해야죠. 실은 고민은 끝이 났고, 계속 잔잔하게 기분이 나쁜 거였다. ‘개뿔 뜯어먹는 소리 말고 닥치고 하세요’ 누군가에게 이 말이 듣고 싶었고, 안마의자라면 그 말을 해줄 것 같았나 보다.
- 사무장이 있긴 한데, 저도 제가 움직여야 해요. 큰돈을 벌진 못하지만 그게 마음이 편해요. - 그래도 나보다 많이 벌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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