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집 904호 민준이 엄마, 이태정
집 현관 문고리에 쇼핑백이 매달려 있었다. 오쏘몰 두 박스와 메모 두 장. 수능을 치는 아들을 위해 앞집 904호 민준이 엄마와 딸 민서의 파이팅 메모였다. 오며 가며 인사는 했지만 수능을 치르는지는 어떻게 알았는지. 고맙고 따뜻하고 정다웠다.
아빠, 엄마, 초등학생 오빠 민준이와 여동생 민서. 904호는 나에게 여름이다. 한여름에 만나는 그들의 평범한 모습과 그들이 내는 평범한 소리가 무척이나 좋다. 동네 무인카페에 모자를 눌러쓰고 ‘노트북 친구’와 앉아 있었던 날, 편안한 차림으로 산책을 하고 온 듯한 네 명은 기계 앞에서 재잘재잘 댔다. ‘난 이걸 먹을 거야’, ‘그거 말고 이거 먹어’, ‘이거 말고 저걸 눌러야 돼’, ‘그거 아니야’,
또 늦은 여름 저녁, 자전거 남매를 만나기도 한다. 횡단보도 앞에서 아빠와 인사를 나누는 사이, 둘은 이미 ‘요시땅’이다. 엉덩이를 살짝 든 채, 초록색 신호등에 불이 들어오기만을 뚫어지게 보고 있는데, 땅 하고 신호등이 바뀌자마자 자전거 바퀴를 세차게 굴리면서 나아간다. 세상에서 가장 신나게 아빠는 오든지 말든지.
그들은 모를 거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센서등에 불이 켜지고,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를 때 앞집에서 나는 냄새가 얼마나 평온한지. 때로는 갈치 굽는 냄새가, 또 때로는 삼겹살 냄새가 얼마나 안온한지. 간간이 아주 멀리서 들리는 듯한, 민준이나 민서를 혼내는 엄마의 목소리가 오늘 하루도 무사히 보냈구나 집에 왔구나, 얼마나 평화로운지.
- ‘겁쟁이는 도망가는 것을 택하고 용기 있는 자는 위험을 택한다‘ 라고 적어주셨어요.
- 손글씨를 부탁받고 이것저것 찾아보다가 이게 눈에 들어왔어요. 아이들에겐 도전을 해야 한다 라고 하는데, 저는 그러지 않고 있거든요. 나이가 들수록 위축이 되기도 하고요.
기억이 맞다면 백영옥 작가가 쓴 신문 칼럼이었을 것이다. 외국인들이 이해 못 하는 우리나라 표현 중에 하나가 ‘잘 산다’ 라고 한다. 우리는 ‘그 사람 잘 살아’, ‘그 집 잘 산다’ 라고 할 때 부자, 돈이 많은 걸 말한다. 그걸 외국인들은 의아해하는 것이다. 각자의 가치관, 생각, 신념에 따라 잘 사는 방식이 다를 텐데, 왜? 잘산다가 왜 꼭 돈이어야 하냐고.
출근길에 종종 책가방에 앙증맞은 키링 두 개를 단 초등학교 4학년 단발머리 민서와 단둘이 엘리베이터를 탈 때가 있다. ‘민서야 너는 어쩜 그렇게 귀엽니’ 라는 시답잖은 말을 거둔 지는 꽤 됐다. 말 거는 걸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1층에 다다르면 민서는 미리 열림 버튼을 누를 채비를 한다. 그리곤 열림 버튼을 꾹 누른 채, 친절하지는 않지만 제 할 일을 다하는 것처럼 꼿꼿하게 말한다.
- 안녕히 다녀오세요.
그래 민서야 우리 안녕히 다녀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