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른한 날
3부 2막 제 이름을 갖기까지
<나른한 날>
문득, 창밖에 크고 선명한 구름이 평화로운 기분을 들게 하면 이상하게 억울함을 느꼈다. 그 시절도 이렇게 평화로웠는데.. 이런 날을 함께 하지 못한 시간에 대한 억울함이었을까.
나른한 날, 아니 널 기억해 내려는 오늘의 핑계가 날 구깃하게 만든다.
몇 번의 반복되는 단절에도 널 잊은 적이 없다. 한때는 이 감정이 집착인 줄 알고 외면하려 했다. 왜 이렇게 계속 생각이 나는지. 어떤 오만으로 널 정리하고 싶었는지. 이 감정 앞에 어떤 상처가 그 길을 막아섰는지. 무슨 말을 하지 못했기에, 목 끝에 남은 수많은 말들을 넘기지 못하고, 끝내 이름 하나 꺼내어 부르지 못한다.
내가 선택한 단절은 감정이 아닌 이성에서 나온 판단과 행동이었으니, 감정은 여전하다. 내 감정. 다시 상처받을까 두려워하며 외면했던 내 감정. 방어적인 태도. 그게 여태 나를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하게 했다.
나의 아픔을 분해하여 평범한 일상의 특별함을, 곁을 내어주는 일의 가치를, 그 곁에서 볼 수 있었던 나의 또 다른 모습을, 그것들이 반짝여 시선을 거둘 수 없는 마음에 결국 진심이었던 전부를 인정할 수밖에.
실은 너에게 향했던 본능이 무서웠다고. 실은 온통 신경이 쓰이는 게 과거를 조금이라도 닮을까 자신이 없다고. 마음과는 다른 두려움에 사로잡혀 많은 생각이 족쇄가 되어 이런 사람이 되어버렸다고. 떠나가던 너의 뒷모습이 눈에 아른거려 다가가지도, 조금도 날려 보내지도 못했다고.
결국 솔직하지 못했던 태도로 놓쳐버렸다. 아쉬움이 또 한 번 고개를 들고 우리의 가능성을 바라본다. 지금은 그 억울함의 이유를 안다. 방어적이고, 회피적인 태도를 벗어나 널 더 이해할 수 있는데, 다가갈 수 있는데, 이젠 그럴 수 있는데, 만나지 못하는 하루들을 억울해하며, 아쉬워한다.
그 억울함은, 그 시절의 너와 나를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그리움의 다른 이름이었다.
각자의 고유함을 잃지 않고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게 옳은 방향이라 생각하면서 나아가야겠지.
과거에 매이는 기분이, 현실이 아닌 환상 속에 사는 듯한 기분이 안식처이면서도 현실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 같다. 확인하지 못한 감정은 환상 같아 인정하기 어려웠다.
나의 오랜 허상아. 너를 잊기 위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생각한 적이 있다. 그게 환상 속에 갇히게 했나 보다. 그러다 그 실체를 느끼게 된다면 아주 잠시 전기가 흘러 빛을 낸 전구가 된 느낌이 들었다. 그 실체를 만나 심장이 놀랐나 보다.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