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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한시 Jul 15. 2024

기미상궁도 못할 유전자

전 레몬도 씹어먹어요...

내 주위에는 미식가가 몇 명 있다. 어디에 가면 어느 식당에 가서 특정 음식을 먹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음식이 어떤 맛인지 세세하게 침을 꼴깍 삼키며 말한다. 그런 사람들과 같이 다니다 보면 의도치 않게 맛집에 들르기도 하는데, 한 입 먹어보면 느껴진다.


'뭐가 다르다는 거지?'


내 입맛에는 거기서 거기다. 다 비슷한 맛인데, 뭐가 더 맛있다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 정말 음식 못하는 집이 아니고서야 내 입에는 어디서 먹으나 비슷하게 느껴지니, 난 식당에서 줄 서서 기다리는 거 별로 안 좋아한다. 노력 대비 성과가 적다고나 할까.

물론 맛집을 소개해주거나 데려와준 사람이 잔뜩 기대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어때?"라고 물으면, 저 마음속 아니 뇌 속 깊은 곳에서 최대한 감동 어린 반응을 끌어낸다. (사회화가 잘 된 T는, 상황에 따라 F처럼 행동할 수 있다.)



친구들과 닭갈비를 먹는데, 철판에서 지글지글 익어가는 닭갈비를 보며 친구가 물었다.

"다 익었을까?"

그래서 대답했다. "글쎄... 먹어봐"

그랬더니 친구들이 빵 터진다. 먹어봐야 익었는지 파악할 수 있는 나로서는 친구들이 왜 웃는지 의아하다. (솔직히 말하면 난 먹어봐도 음식이 익었는지 잘 모를 때가 많다.)


며칠 전에 아이가 냉족발 밀키트를 먹어보고 싶다고 해서 사 왔다. 설명서에 면발을 6분 삶으라고 되어있길래, 정확히 6분을 삶고 소스를 끼얹어 족발과 함께 아이에게 내어주었다. 아이가 먹어보더니 이야기한다.

"엄마, 이거 안 익는 것 같은데? 먹어봐요"

미안하지만 엄마는 먹어봐도 익었는지 잘 모른다고...

"그래? 어쩌지? 면이 좀 불겠지만 그래도 전자레인지에 조금 더 돌려볼까?"


옆에서 신랑이 한 입 먹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는다. 그리고 내게 말했다.

"익었는지 확인도 안 해보고 애한테 음식을 주는 거야?"

그렇게 말할 거면 네가 하시든가요... 본인은 한 달에 두세 번 음식을 만들까 말까, 그 외는 다 내가 밥 하는데 '이게 웬 타박인가' 싶어 나도 성질이 난다. 덜 익는 면발이 부부싸움에 불을 붙인다.


난 천성적으로 둔한 편이다. 감각이 예민하지 않고, 성격도 그다지 예민하지 않다.

어디에서든 머리만 대면 자는 스타일이고, 스트레스가 심해도 한숨 자고 일어나면 대충 잊어버린다. 그리고 이런 둔함이 살아가는 데 편하다고 생각한다. 스트레스로 잠을 설치고 밥을 못 먹는 사람보다는 생존에 유리하므로. 다만, 내 아이를 위해 음식을 만들 때는 나의 이런 맛을 못 느끼는 둔함 때문에 맛깔난 음식을 만들지 못하는 것 같아 가끔 미안해지기도 한다.




한참 유전자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매일같이 '유전자에 따라 질병에 걸릴 확률이 00배 차이'와 같은 기사가 쏟아질 때가 있었다. 그런 기사를 볼 때면 '유전자를 바꿀 수도 없는데 뭐 어쩌라는 거지, 그냥 조심하라는 경고만 계속 날리는 거잖아'라는 생각에 피곤했다.


그러나 비만 관련 유전자가 나오면서 새로운 시각을 접했다.

'비만은 자기 관리를 하지 못하는 게으름의 결과로 비난받을 게 아니라, 유전자의 영향으로 인한 것이다. 그러므로 비만에 대해 개인 탓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출처: https://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883294)

물론 식이와 운동 역시 비만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분명하지만, 사람마다 같은 양을 먹어도 찌는 정도가 다를 수 있으니 함부로 평가하지 말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사실 저 기사를 볼 때는 '비만을 질환 영역으로 끌어들여서 환자를 늘리려는 의료계의 전략'처럼 보여 미심쩍기도 했다. 그러나 마른 사람들이 게으르다며 뚱뚱한 사람들을 손가락질하는 현상에는 찬물을 끼얹는 것 같아 내심 반가웠다.


최근에 뉴스에서 '맛에 대한 유전자와 와인 선호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유전자에 따라 와인의 선호도가 달라진다면, 전문가들이 평가한 훌륭한 와인의 맛 역시 별로 의미 없는 게 아닌가?'라고 말이다. 다시 말해, 비싸고 좋은 와인을 알아보지 못하는 건 경험의 부족이나 숙련도의 문제가 아니라 단순히 유전자의 차이로 인한 선호도라는 것이다.  




명문대, 안정적인 직장, 결혼과 출산 등등...

정답이 존재하고 이를 맞추며 살아가는 것이 익숙한 세상살이에서, 음식 선호도조차 '고급 음식을 알아보지 못하는 미숙한 입맛'으로 평가받아온 것 같았다. 그런데 유전자에 대한 설명을 들으니 나의 입맛이 이제 진정한 '취향'의 영역으로 인정받아 같아 왠지 기쁘다.


이제 당당히 말할 수 있다.


"맛있냐고 묻지 마세요.  저는 웬만하면 (특히 님이 사준다면) 다 맛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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