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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복숭밤 Aug 28. 2023

봄에 만난 단풍잎

23/04/07


어린 시절, 가을이면 색색깔로 물든 낙엽을 주워다 아무 책들에 꽂아 넣곤 했다. 어디에 무슨 나뭇잎을 끼워두었는지 까맣게 잊고 지내다, 이듬해 봄 빳빳해진 낙엽을 발견하는 일. 그게 참 좋았었다. 선물을 받는 기분이었다.



며칠 전 그런 단풍잎 같은 문자를 한 통 받았다. 입장권을 구매했던 전시가 연장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내가 티켓을 샀던가?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작년 12월에 얼리버드 표를 구매한 기록이 있었다. 전시 기간이 늘어나지 않았다면 까무룩 모르고 끝났을 텐데, 횡재한 기분이 들었다.














문자를 받은 날은 2년간 근무했던 직장과의 계약이 만료되는 날이기도 했다. 퇴사를 앞두고 갈 곳이 정해졌고, 공교롭게도 바로 맞은편 건물로의 출근이라 그만둔다는 실감이 잘 들지 않았다. 오히려 새 직장에 또 적응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러면서도 사고 없이 에세이 연재를 병행해야 한다는 걱정에 속이 착잡했다.



함께 일해온 외국인 교원들이 작별 인사와 덕담을 전하러 왔을 때도 나는 헤어지지 않을 사람처럼 See ya, 그렇게 손을 흔들었다. 근무 마지막 날, 동료 선생님들과 저녁을 먹고 집에 돌아오니 11시가 다 되어 있었다. 샤워를 끝내고 책상 앞에 앉아 겨우 편지들을 열었다.



그동안 고마웠다는 말, 앞날을 진심으로 응원한다는 글자들. 2년 동안 그저 내 몫의 일을 했다고만 생각했는데, 그사이 깊고 단단한 인연이 함께 자라고 있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그 덕에 두 해를 버틸 수 있었다는 것도. 촌스럽게 눈물이 핑 돌았다.





외국인 동료 한 명은 4월부터 새롭게 적응해야 할 상황을 두고 이렇게 덧붙이고 있었다.


But then I guess that is just the way life goes.


이런 게 우리 인생이 흘러가는 방식이겠지. 부딪히고 적응하고 그러면서 무뎌지고. 그러다 어느 날 책 속에 끼워둔 붉은 단풍잎을 만날 때처럼, 내 옆을 지켜온 것들에 새삼 감사하며 다시 기운을 낸다.



같은 캠퍼스로 출근하긴 하지만 이전과는 전혀 다른 직무를 맡게 되었다. 아직 본격적으로 업무에 투입되지 않았는데도 낯선 환경을 소화하는 데만 벌써 몇 배의 에너지를 쓰고 있다. 종일 뻣뻣하게 경직되어 있다가 집에 돌아오면 쓰러지듯 잠들었던 이번 주. 금요일이 이렇게나 반가울 줄이야.



아무래도 이번 달은 이렇게 쭉 긴장한 채로 보낼 듯하다. 아프지 않고 차근차근 잘 적응하길 바랄 뿐이다. 몇 주 후 비로소 어깨가 뭉치지 않는 날이 오면, 느긋하게 전시를 보러 가야지. 마침 유월까지 전시가 연장되었다고 하니, 서두를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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