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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띵북 Feb 12. 2022

이제 SF 장르를 사랑하게 될 거 같다.

우리의 오늘을 구원할 우주에서 온 이야기『너의 다정한 우주로부터』

절대 따라오지 마.


식탁 위에 놓인 구겨진 메모 한 장. 그게 남겨진 전부였다.

겨우 그 한마디를 버려두고 하나는 미래로 떠나버렸다.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요."

"제한 없이 몇 번 이든 미래로 도약하실 수 있어요. 하지만 한 번 정착을 택하시면 여정은 거기서 끝입니다. 특별한 사유가 없다면 다시 미래로 나아가실 수는 없어요."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웜홀 앞.

"이주자 한정원 씨. 이곳에 정착하기를 희망하십니까? 아니면 계속 나아가시겠습니까?"

"계속 나아가겠습니다."

"그럼, 미래에서 만날 수 있기를."


현실을 건너 우주의 끝에서 만난 여섯 편의 다정한 이야기. 2020 SF 어워드 대상 수상자 이경희『너의 다정한 우주로부터』이다.



SF 장르 소설을 그다지 즐겨읽지 않는 나로서 어쩌면 모험 같은 독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SF 장르 소설은 영화만큼이나 나의 목마름을 채워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 병맛인데 너무 신박하다. 한 편 한 편 아껴읽고 싶을 정도로 다양한 소재와 이야기 전개가 책장을 넘길 때마다 끝나는 게 아쉬울 정도로 재미있다. 그리고 그동안 등한시했던 SF 장르를 왠지 사랑하게 될 거 같다


살아 있는 조상님들의 밤

"애미야, 국에 왜 국물이 있니?"

시어머니가 잔뜩 짜증 난 목소리로 물었다.

"국이니까 당연히 국물이..."

"에휴, 아무튼 얘는 뭘 제대로 하는 게 있어야지. 봐라, 국물이 이렇게 많으니깐 먹을 때마다 입에서 줄줄 새잖니."


시어머니가 국을 떠 입에 넣을 때마다 턱 아래 뚫린 구멍으로 국물이 죄다 쏟아지고 있었다.

그런데, 어머님은 재작년 돌아가셨는데...


조상님들이 되살아난 세상, 제사 없애기 운동 본부장 요한나는 무덤에서 돌아온 시어머니와 마주한다.

스티브 잡스가 무덤에서 뛰쳐나와 아이폰 엔지니어들을 고문하고 되살아난 독재자들과 조상들이 군대를 완전히 장악하는데... 무엇보다 조상의 조상의 조상들의 끊임없는 꼰대짓에  전 세계는 아수라장이 되고 만다.


우리가 멈추면

사측의 부당한 요구에 파업을 앞둔 성간교통공사 노조는 지구에 소행성이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지구를 지키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을 테러로 왜곡해 버리는 언론과 사측으로 지구는 더욱 위험에 빠지는데..


행성 간 이동이 가능한 우주 시대. 기술은 발전해도 권력의 거대한 부조리함은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았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는 노동문제와 비극적 현실을 잊지 않길 바라는 작가적 메시지가 담겨있어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온다.


그 외에도 전쟁으로 인공지능 기계들만 남은 미래 이야기 『바벨의 도서관』, 침을 통해 전염되는 외계인의 신체강탈 바이러스 이야기 『신체강탈자의 침과 입』, 서두에 소개된 사랑하는 이를 쫓아 미래로 계속 나아가는 이야기 『저 먼 미래의 유크로니아』 등 총 여섯 편의 이야기가 수록돼 있다.




좀비, 인공지능, 외계인, 바이러스, 지구 종말, 사이비 종교 등 유쾌하고 재치 있게 이어지는 이야기뿐만 아니라 기존 SF가 가지고 있는 전형적인 과학적 가설들도 담겨있다. 특히 시공간을 넘나드는 『저 먼 미래의 유크로니아』는 단순한 사랑과 증오의 이야기로만 생각했던 나에게 충격을 안겨준 작품으로 끝나도 끝나지 않은 거대한 우주의 서사를 느끼게 해줬다.


이경희 작가의 여섯 편의 단편소설은 SF 장르지만 정치, 언론, 기업의 거대 부조리, KTX 민영화 저지 투쟁, 코로나19바이러스, 혐오 문화와 젠더 등 현실의 그림자를 그대로 담고 있다. 작가는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과학 기술은 가짜고 엉터리라며 그냥 실험적 과학 문학이라 말한다. 하지만 나는 어쩌면 그 가짜고 엉터리일 줄 모르는 기술에 우리가 점령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도 나는 AI가 추천해 주는 음악과 시사를 들으며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으니깐 말이다.


만약에 말이야. 행복으로 가는 문이 문 앞에 나타난다면 너는 어떻게 할래? 문 너머에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행복이 있지만, 대신 문을 넘어가는 순간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면, 이곳에서 함께 한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면 말이야. _p.291

그 문을 여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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