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내게 준 첫 번째
노래는 추억들을 부른다. 김동률의 노래를 듣다 보면 동규와 파리를 여행했던 그때로 되돌아간다. 건축학개론으로 강한 인상을 주었던 '기억의 습작'은 내 머릿속에 더 이상 이제훈과 수지의 풋풋한 사랑이야기가 아니라 예쁜 거리를 걸으며 맛있는 음식을 먹고, 동규와 대화를 나누던 그때로 강하게 기억된다. 기름 냄새 올라오는 숙소에서 뒤집어 놓은 캐리어에 과자를 뜯어 올려놓고 맥주를 마시며 동규와 나는 김동률 노래를 들었다.
유럽을 여행하면서 김동률 노래를 듣고 싶다는 내 버킷리스트는 프랑스에서 참 많이 실현되었다. 런던보다 거리가 예뻐 걸어 다니기 좋았고, 이어폰에서 나오는 김동률 목소리는 거리를 더 로맨틱한 공간으로 만들었다. 콘서트를 갔을 때 말주변 없는 내 가수의 3시간짜리 무대가 어떻게나 짧게 느껴지던지..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노래를 하는 그 모습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박혀 있다. 김동률 콘서트를 가면 오케스트라의 웅장함을 느낄 수가 있는데 김동률의 목소리는 중저음의 비올라 같다. 오케스트라가 만들어내는 연주에 김동률 목소리의 현이 얹힌다. 갑자기 팬심이 넘치는 이야기였지만 파리 거리는 김동률과 잘 어울렸다.
동규와 나는 몽소공원에서 좋은 시간을 보냈다. 갑자기 내리는 비를 맞았고, 구름이 빠르게 지나가는 것도 보면서 대화를 나눴다. 모든 게 만족스러웠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그땐 모든 상황이 아름다웠다.
여행하는 내내 동규가 길을 안내해 주어서 온전히 여행에 집중할 수 있었다. 혼자 다닐 때는 핸드폰으로 수시로 지도를 확인하고 소매치기를 신경 쓰느라 주위 풍경을 많이 놓쳤다. 사람을 멀리하고 싶은 마음도 여행의 이유 중 하나였는데, 이제는 마음 맞는 사람과의 여행이라면 언제든 가고 싶다란 생각이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나 몽소공원에서 나온 우리는 뛰를리 공원을 가로질러 음식점을 찾았다. 뛰를리 공원 안에는 관광객과 파리 지앵들이 섞여 각자만의 여유를 누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앉아있는 초록색 벤치가 탐났다. 저기서 책을 읽으면 하루 종일 앉아 몇 권이라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뛰를리 공원은 파리 중심부에 있는 오래된 '정원'이다. 루브르 박물관과 콩코르드 박물관 사이에 있다. 공원 곳곳엔 로댕, 자코메티의 조각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뛰를리 공원은 절대적 왕권을 상징하는 정원답게 나무들을 반듯하게 각을 맞춰 조경해 놓았다. 자연마저 통제하려는 권위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시민이 주인이 되었다. 뛰를리공원은 권위를 내려놓고 시민들에게 여유를 선물해주고 있다.
뛰를리 공원을 구경하고 있을 때 동규가 레스토랑을 검색했다. 아무거나 상관없다는 내 주문에도 불구하고 동규는 열심히 레스토랑을 찾았다. 뛰를리 공원을 지나 몇 블록 걷다 보면 레스토랑이 있었다. 레스토랑의 이름은 'Les Antiquaires' 로 발음하기는 어려웠다. 레스토랑 앞에는 사람들이 북적였다. 다행히 기다리는 손님들은 아니었고 식사를 마치고 나와 있는 손님들이었다. 테라스에서 음식을 놓고 와인잔을 기울이는 파리 사람들이 많았다. 레스토랑 안은 엔틱 한 디자인으로 꾸며져 있었다. 오래된 레스토랑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와이셔츠에 넥타이까지 맨 점원들이 우리를 웃음으로 맞아 주었다. 주변을 둘러봐도 동양인은 동규와 나뿐이었다. 오히려 그런 점에서 더욱 신뢰가 갔다. 영국에서보다 알아보기 힘든 메뉴판을 번역해 가면서 우리는 각자가 먹고 싶은 것을 골랐다. 동규는 구글 평점이 높다는 감자와 당근이 들어간 소고기 스튜를 주문했고, 나는 잠봉이 올라간 트러플 파스타를 주문했다. 음식이 나오기 전 쫄깃한 식전빵이 나왔다. 빵이 매우 훌륭했다. 빵 맛만으로 레스토랑의 음식맛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음식이 나왔다. 남자들끼리 음식 사진은 잘 찍지 않지만 예쁜 디쉬에 나온 음식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역시나 음식맛은 훌륭했다. 동규가 급하게 찾은 레스토랑은 성공적이었다. 스튜에 식전빵을 찍어먹었다. 레몬이 조금 들어갔는지 시큼한 맛이 있었지만 음식맛을 전혀 헤치지 않았다. 고기는 식감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입에 들어가는 순간 녹아 없어지는 고기에 그 생각을 고쳐 먹기로 했다. 잠봉이 올라간 트러플 파스타는 적당히 익힌 파스타의 식감이 너무 좋았다. 파스타의 트러플 향이 먹으면서도 계속해서 식욕을 돋았다. 잠봉의 짭짤한 맛이 트러플 파스타의 느끼할 수도 있는 부분을 잘 잡아 주었다. 감히 올해 먹은 음식 중 최고라 생각이 들었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구글맵을 찾아보다 근처에 내가 표시해 두었던 베이커리가 생각났다. '유퀴즈'에 파리에서 베이커리를 하는 우리나라 제빵장인이 나온 적이 있다. 프랑스의 전통빵인 '쁠랑'을 만드는 대회에서 당당히 1위를 했다고 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와서 전통 음식 대회에서 1위를 한 것이다.
(시루떡 만들기 대회에서 1등 한 외국인을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빵과 커피를 사서 가까운 공원에 가져가 먹기로 했다.
Mille et Um 베이커리 안에는 한국인으로 보이는 종업원이 있다. 제빵장인의 아드님이라고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빵집 안에는 외국인들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이 만든 빵을 빵의 나라에서 인정한다고 하니 어깨가 좀 으쓱했다. 우리가 주문할 차례가 되니 그 종업원이 한국말로 '주문 도와드릴까요?'라고 물었다. 예상치 못한 한국어에 마음이 편해졌다. 우리는 쁠랑과 에스프레소를 주문했다. 그리고 근처 공원으로 향했다.
에스프레소의 맛은 잘 모르지만 커피의 쓴맛이 달달한 빵의 맛과 잘 어울렸다. 오늘 여행은 공원에서 시작해공원으로 끝났다. 동규를 따라 나온 여행의 만족도는 최상이었다. '공원 덕후' 동규 덕에 나는 한국에 돌아와서도 공원과 친해졌다. 공원을 산책하면서 이어폰에 흘러나오는 김동률 노래를 들으면 나는 다시 평화로웠던 '몽소 공원'으로 돌아간다. 가끔 외롭다고 생각되는 때에 공원에서의 산책은 내게 부정적인 마음을 물리칠 힘을 주는 공간이 되어 준다. 시간이 지나면서 김동률 노래는 더 진한 울림을 주고, 노래에 담는 내 추억은 켜켜이 쌓인다. 그리고 나도 혼자 보내는 시간이 무서워지지 않을 만큼 제법 원숙해졌다. 외롭지 않고 고독감을 즐기는 사람이 되는 것. 여행이 끝난 내가 바라던 두 번째 버킷 리스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