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형이와 성은이
살아오면서 주변에 남아있는 친구들은 많지 않다. 시간과 돈을 써가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을 때도 있지만, 나는 사실 그런 에너지가 많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자연스럽게 관계들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지금은 마음을 나누는 친구들이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데(이것도 많은 것 같다.) 그중 한 명은 도형이다. 도형이는 중학교를 다니며 알게 된 친구로 깔끔한 이미지에 행동이 바른 친구였다.(사람마다 도덕적 기준은 다르지만 나에게 도형이는 바른 이미지다.) 본격적으로 깊이 친해진 건 성인이 다돼서 이지만.
한참 우리 나이 때 친구들이 취업준비로 열심히 일 때, 도형이는 대기업 은행에 은행원으로 취업에 성공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은행을 그만두고 지방으로 내려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도 제주에 있을 때라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내가 서울로 다시 올라오면서 도형이와의 만남이 잦아졌다. 그리고 여자 친구를 만나 같이 일을 하기 위해 은행을 퇴사했다는 둘의 이야기를 들었다. 성은이는 첫인상부터 좋은 사람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도형이 친구인 나를 어려워하지 않고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그래서 성은이와도 금방 친해 질수 있었다. 둘은 선한 인상을 풍기는 예쁜 커플이었다. 결혼식 없이 혼인 신고만을 한채 같이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나중에 듣게 되었다.
내가 유럽여행을 결정했을 때 도형이는 나와 프랑스 여행을 계획했었다. 나와의 여행을 성은이는 흔쾌히 허락해 주었지만, 오히려 내 쪽에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서 도형이한테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나도 너랑 둘이 여행하면 너무 좋지. 근데 성은이도 예산에서 삶이 답답할 텐데.. 그리고 너네 신혼여행도 못 갔잖아. 나랑 계획한 정도로 날짜를 뺄 수 있는 거면 성은이랑 같이와. 그리고 하루정도만 나랑 만나서 여행하는 게 어때?"
알람 맞춰 놓은 시간보다 일찍 일어나는 일은 흔치 않았다.
어제저녁에 잠을 설쳤지만 상쾌한 마음이 드는 건 오늘 도형이네 부부를 만나는 날이기 때문이다.
한국에 있을 때 충청도 예산까지 100km가 넘는 거리를 운전해서 도형이네를 만나러 갔는데, 그동안 갔던 거리를 한방에 다 갚아 버릴 맘인지 지구 반대편까지 나를 보러 왔다. 2층 침대에서 내려오다 삐끗한 발가락도 거짓말처럼 괜찮아졌다. 어제는 도형이네 부부를 데리고 다닐 여행지를 미리 답사했다. 둘이 시간 보내기도 벅찬데 여기까지 와서 나를 보러 와준다는 게 고마워서 여행을 잘 준비해 두고 싶었다. 무엇보다 여행사진 하나 없는 둘에게 예쁜 사진을 선물해 주고 싶었다.
설레는 마음에 준비는 빨리 끝냈지만 약속장소를 잘못 찍는 바람에 도착시간이 예상보다 늦어졌다. 설상가상으로 내 핸드폰에 와이파이가 잘 터지지 않아서 가끔 연락이 끊기기도 했다. 개선문 앞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개선문 앞에 있는 지하철 역은 출구가 여러 개라 걱정스러웠다. 몇십 년을 이어온 인연의 끈 때문인지 우리는 운 좋게도 같은 출구로 나오게 돼서 쉽게 만날 수 있었다.
파리 한가운데서 친구들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당연히 매우 긍정적인 기분이었다. 그리고 몇 주 사이에 지치고 외로웠던 마음이 도형이와 성은이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 녹듯이 사라졌다. 나를 만난다고 도형이는 전날 쇼핑을 하고 꼬까옷을 입고 왔다. 친구들은 가장 처음으로 내 발부터 걱정했다. 걱정받는다는 게 이렇게 따듯한 일일줄이야.
우리는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예쁜 카페로 들어왔다. 어제 답사 중에 성은이가 좋아할 것 같아서 체크해 둔 곳이다. 공주풍 분위기가 나는 카페였는데 마카롱이 디저트로 나오는 것 같았다. 성은이는 가게 외관을 보자마자 가고 싶어서 표시해 둔 곳이라고 이야기했다. 성은이 취향저격을 시킨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카페 안에서 맛있는 커피를 마시고 나의 영국 여행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오늘 스케줄에 대해서 브리핑해 주었다.
오늘 우리는 동규에게 소개받았던 '몽소공원', 도형이네가 가고 싶어 했던 '몽마르트르 언덕' 그리고 도형이네가 날 위해 준비한 '바토무슈'에 갈 계획이다. 한정적인 여행 시간에 공원을 데려간다는 게 미안한 생각도 조금 들었지만 둘은 흔쾌히 내 여행 콘셉트를 따라가기로 결정해 주었다.
맛있는 커피와 디저트를 즐기고 우리는 개선문 앞에서 사진을 찍기로 했다. 그리고 이 날의 날씨는 내가 런던과 프랑스에 있는 동안 가장 좋은 날씨였다. 사진이 잘 나올 것 같다는 기대감이 들었다. 많은 관광객들이 개선문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우리도 줄끝에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사진 찍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금방 우리 차례가 왔다.
사진을 찍고 '몽소 공원'으로 향했다. 몽소공원까지는 걸어서 20분 정도 걸렸다. 동규와 왔을 때 봐 두었던 여러 곳에서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는데 둘의 표정이 너무 예뻤다. 몽소공원의 한적함을 친구들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동규와 함께 갔던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었다.
동규와 왔을 때보다 더 다양한 음식들을 주문했다. 친구들은 이날 레스토랑에서의 식사를 파리 여행에서 아직까지 최고로 기억하고 있다.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몽마르트르 언덕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몽마르트 언덕은 우리나라의 남산처럼 올라가는데 여러 길이 있다. 몽마르트르 언덕을 가기 위한 대표적인 길은 라파예트 백화점에서 시작하는 오르막길인데, 이 오르막이 너무 길게 이어져 나는 어제 답사에서 다른 길을 선택하기로 했다. 한국 여행자들은 잘 선택하지 않는 길. 파리 시내에서 여행 금지 구역이라고도 알려진 zone.
역이름은 잘 생각나지 않는다. 여행 이후에 이 지역이 많이 위험한 지역이라는 것을 알고는 친구들에게 미안했지만 가장 편하게 몽마르트르를 올라갈 수 있는 길은 이 길이라 생각했다. 역 도착 전 3 정거장 전부터 지하철 안에는 흑인들의 비중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지하철 안의 공기도 바뀌었다. 친구들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도착해서 문이 열리자 사람들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하는데, 사람들에 치이다 보면 출구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가 나온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다 보면 바깥과 연결되는 부근쯤에서 좋지 않은 냄새와 사람들의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친구들 표정이 얼어붙어 있었다. 좋지 않은 냄새는 지금 보니 마리화나 냄새였다. 사람들은 출구를 빠져나오는 우리에게 어떤 말로 소리치기 시작했는데 정신이 없어서 친구들을 데리고 빨리 그곳을 빠져나와야 했다. 우리가 조금 전까지 여행하던 파리 시내와는 다르게 차들의 경적소리가 난무하고 엠뷸런스 소리는 사방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정비 안된 거리의 음식물 쓰레기통은 여기저기 널려 있고 악취를 풍기는 노숙자는 우리를 반기지 않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이날 친구들과 여행을 담고 싶어 고프로로 촬영을 했는데, 나를 뒤 따라오던 친구들의 표정이 심각했다. 지금 전화해서 사과해야겠다.
그래도 힘든 오르막길을 오래 걷지 않고 몽마르트르 언덕 꼭대기에 있는 사크레 쾨르 대성당까지 쉽게 도착할 수 있었다. 사크레 쾨르 대성당을 등지고 파리시내가 시원하게 펼쳐 있었다. 우리는 서로 맑은 하늘 아래 있는 파리 시내를 눈에 담기 바빴다.
많은 관광객으로 북적였지만 미리 봐둔 장소에서 친구들 사진을 찍어 주었다. 그리고 보통의 관광객들이 올라오는 곳으로 우리는 몽마르트르 언덕을 구경하며 내려갔다.
바토무슈를 경험할 시간이 되니 어느새 파리 시내도 하나둘 불빛을 켜기 시작했다. 에펠탑도 파리의 주인답게 가장 아름다운 불빛을 내고 있었다. 파리의 야경 사이로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유럽 도시에서 사이렌 소리는 이제 익숙한 백색소음이 되었다. 나는 오늘 친구들과 에펠탑을 보기 위해 그동안 에펠탑으로 향하는 시선들을 잡아두기 위해 애썼다. 가장 좋은 시간대, 가장 좋아하는 사람들과 그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이다. 바토무슈가 시작하기 전 우리는 에펠탑에 가까이가 구경을 했다.
그리고 바토무슈 표를 수령하러 선착장으로 향했다.
유람선은 레스토랑을 통째로 물에 띄워 놓은 것 같았다. 배낭여행자에겐 어울리지 않는 호사였다. 센 강을 천천히 유영하며 창밖에 달라지는 배경을 보면서 우리는 오늘 하루, 두 번째 최고의 식사를 했다.
친구들 결혼식 사회나 축가를 많이 했지만 무엇보다 기분 좋은 일은 여전히 깨 볶고 잘살고 있는 모습들이야.
덕분에 나도 내 옆에 사람과의 미래를 그리는 일에 부정적이지 않아 다행이야.
내가 본 어느 부부보다 하루 24시간을 꽉꽉 채워 서로 옆에 있는 너희를 보면서 예산까지 얼굴 보러 가는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았어. 보고 돌아오는 길 내내 나도 항상 기분이 좋았으니까.
나의 긴 여행에 잠깐 들러 준 것은 잊지 못할 일이었어.
지구 반대편까지 와서 얼굴 본다는 것만큼 기발한 상상은 없었지.
드레스에 턱시도 입고 찍은 사진도 없을까 싶어 오지랖 넓은 난, 너희 부부의 첫 해외여행 사진을 남겨주고 싶었다. 사진은 나도 잘 모르는 분야였지만 내가 '애정'하는 피사체는 무조건 아름다울 거란 믿음이 있었으니까.
보면 볼수록 성은이는 정말 넓은 사람인 것 같아.
물론 좋은 사람을 옆에 둔 너도 참 좋은 사람이지.
여행하는 내내 머릿속에 지배적으로 있던 생각이 있었어.
'돈은 참 좋은 거다.'
돈이 많으면 좋은 호텔에서 자고 레스토랑 들어가서 무얼 먹을까 고민하지 않고, 쇼핑도 마음 놓고 할 수 있겠다 싶어. 그게 좋은 여행인지 나는 아직 잘 모르지만.
확실한 건 그 비싼 바토무슈를 경험하고 숙소로 돌아왔을 땐 영롱한 호텔 로비도, 부드러운 하얀 침구도 다 소용이 없더라고.
여행 전에는 바토무슈를 더 기대했지만 몽소공원에 앉아서 이야기하고 몽마르트르 언덕을 걸으며 나눴던 이야기들이 나한텐 더없이 좋은 선물이었다.
뭔가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많다는 건 내 인생에 엄청난 행운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