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로 가는 날

장거리 버스 이동

by Jason

처음 경험하는 장거리 버스 이동에 어제저녁부터 긴장했더니 컨디션이 좋지 않다. 다행히 게스트 하우스 사장님은 무거운 짐을 가지고 다니는 나에게 저녁까지 게스트 하우스 안에 있어도 된다고 배려해 주셨다. 점심만 해결하고 다시 숙소에 들어와서 짐을 싸고, 스위스 교통 패스를 구매했다. 6일권이 무려 60만 원이었다. 숨이 턱 막히는 가격에 끝까지 스위스행을 고민했지만 다시 혼자 유럽을 올까 싶어 거금에 대한 미련을 거뒀다. 60만 원이면 숙소를 잡고 한 달을 묵을 수 있는 가격이었다. 교통 패스권을 구입하고 스위스에서는 게을리 여행하면 안 되겠다는 다짐도 했다.


22시 40분. 오늘 프랑스를 떠나 스위스 베른으로 가는 버스 시간이다. 리옹을 한번 경유해 13시간 동안 버스를 타는 장거리 이동이다. 이동에 가장 부담스러운 건 어깨를 고통스럽게 하는 짐들이다. 가방을 멜 때마다 한숨이 나온다. 숙소의 나선형 좁은 계단도 이제 안녕이다. 계단을 내려가는데 가방의 무게가 무릎으로 전해진다. 한참을 빙빙 돌아 1층에 도착했다. 익숙한 기름 냄새도, 친구들과의 여행, 동규와의 추억과도 이젠 안녕이다.


한 나라의 교통에 익숙해질 때쯤 다른 나라로 이동한다. 열차에 올라타면 큰 가방을 앞뒤로 두 개 메고 있는 나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사람들이 불편해하지 않는 적당한 곳을 파고들어 최대한 움직이지 않은 채 서있는다. 자리가 나도 쉽게 앉을 수 없다. 가방을 한번 내려놓으면 다시 메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종점까지 가야 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없는 칸으로 이동해서 의자에 잠시 엉덩이를 붙였다. 가방이 앉아 있는 건지 내가 앉아있는 건지 내 다리는 반쯤 기마자세를 하고 있다.


종점에 도착하니 열차 안에 승객은 나뿐이었다. 가파른 계단을 보니 한숨이 나온다. 걸음이 둔탁하다. 조금이라도 무게중심을 잘못 잡으면 뒤로 넘어질 것 같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오니 어두컴컴한 파리 시내가 낯선 면을 드러낸다. 중심가에서 벗어난 곳이라 사람이 없었다. 구글맵으로 버스 정류장을 찾았다. 건너편 호텔 뒤쪽으로 향했다. 터미널도 아닌 그곳에 관광버스 몇 대와 캐리어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앉을 수도 없는 길가에 정류장이 덩그러니 있었다. 잘 도착한 것 같았다. 플릭스 버스 표지판을 보고 마음을 놓았다. 아직 타고 가야 할 버스는 보이지 않았다. 가방을 내려놓고 나도 옆에 앉았다.


30분 뒤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기사는 은색 저울을 들고 내렸다. 줄을 선 승객들의 짐을 하나하나 저울 위에 올려놓기 시작했다. 내 차례가 되자 내 가방도 은색 심판대에 앉았다. 그러고는 바로 트렁크에 짐을 옮겨 실어 주었다. 버스기사의 기준이 높은 건지, 내 가방이 추가 요금 없이 무사 통과 됐다는 안도를 하며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의 2층 중간자리를 예약했다. 유럽의 버스가 제시간에 도착했다는 것에 놀랐다. 시간을 보니 제시간에 출발할 것 같았다. 외국인들의 체형에 맞게 모든지 큼직할 거라는 기대는 매번 무너진다. 버스의 레그룸이 내 무릎을 압박했다. 이 상태로 7시간을 이동해야 한다. 다행히 버스는 모든 사람을 태우지 않고 듬성듬성 빈자리를 보였다. 내 옆에 앉아있던 사람도 버스가 출발하자 다른 자리로 옮겨 앉았다. 덕분에 무릎이 숨을 트일 수 있었다. 버스 안은 청결하지 않았다. 무릎이 닿는 곳에 껌이 붙어있었다. 도착할 때까지 저것을 조심해야지 생각했다. 정확히 2시간 뒤에 그 껌은 내 무릎으로 이사했다. 끈적끈적한 이물감이 성가셨다.


버스는 캄캄한 시내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점차 큰 건물들과 불빛들이 멀어지더니 캄캄한 고속도로로 들어섰다. 고속도로를 한참 달리다 긴 기간 정체하는 구간이 있었다. 자동차 백라이트의 빨간 불만이 길게 이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한 시간 정도 정체를 하다 그곳을 빠져나오면서 사고가 난 것을 확인했다. 리옹에 도착하면 환승까지 2시간을 기다려야 해서 다행이라 생각이 들었다.


리옹에 도착해 정류장에 내렸다. 정체 때문에 예상시간보다 한 시간 정도 늦게 도착했다. 7시 20분까지는 1시간 반정도의 시간이 남았다. 버스 안에서 잠깐잠깐 쪽잠을 잤더니 체력이 조금 회복되었다. 장시간동안 구겨져 있던 몸도 펼 수 있었다. 대합실내에는 출구를 찾지 못한 비둘기들이 날아다녔다. 벤치에 앉아 프랑스 편의점에서 사 온 빵을 꺼내 먹었다. 초코칩이 콕콕 박힌 크루아상 같은 빵이다. 프랑스를 여행하면서 끼니 대신 이 빵을 자주 먹었다. 20개가 들어있는 큰 봉지를 사면 여러 번에 끼니를 해결할 수 있었다. 보조 배터리를 꺼내 중간중간 핸드폰을 충전했다. 핸드폰이 없으면 나는 국제 미아가 된다. 스마트폰이 없었던 시절 어떻게 여행을 다녔을까.


스위스 베른으로 출발하는 버스를 환승했다. 버스가 터미널을 빠져나오니 어느새 날이 밝아있었다. 환승한 버스 역시 승객들이 별로 없어 앉고 싶은 자리에서 편하게 이동했다. 한참을 이동하던 버스가 출입국 심사대를 통과하는 것 같았다. 이제 여기부터 스위스다. 자동차의 번호판들도, 심사대의 경찰 복장도 낯설게 바뀌었다. 검색대 하나를 두고 나라를 이동하는 것이 아직 익숙지 않은 모습이었다. 잠시 정차한 제네바에서는 파리시내에서 볼 수 없던 트램이 돌아다녔다. 베른에 도착하기 전 제네바에서 화장실을 갈 시간을 주었다. 잠시 허리도 필 겸 내려서 기지개를 켜며 첫 스위스 공기를 마셨다. 머리를 감은 지 24시간이 지나 꿉꿉함이 있었지만 스위스 공기는 상쾌했다.


맑은 공기 때문일까 스위스의 잔디는 어느 곳보다 푸르다. 푸른 잔디 위에 지어진 집들의 색감도 예뻤다. 고속도로를 달리던 버스기사가 다시 한번 차를 세웠다. 영문을 모르는 내가 버스에 앉아 있자 버스기사는 내 자리로 와서 "덩치야, 나가서 밖을 구경해. 밖에 엄청난 것이 있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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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길게 뻗어있는 스위스의 산맥이 보였다. 장엄하다 못해 비현실적이다. 꼭대기에 구름이 걸려 있어 얼마나 높은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강가의 반짝거리는 윤슬 위로 산맥의 흐릿한 형태가 비추었다. 프랑스를 떠나 조금은 침울했던 마음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사진을 찍어 가족들에게 보내 주었다. 강한 햇빛에 사진이 잘 나왔는지 확인하지 못했지만 카메라를 어느 곳에 걸어도 작품이 될 것 같았다. 저 강가 어딘가엔 분명 눈 덮인 산을 그리는 밥아저씨가 있을 거야..


이리저리 구경을 마치고 버스 앞에서 서성이는 내게 버스기사가 다시 다가왔다. 휴게소 2층으로 올라가면 파노라마 뷰를 볼 수 있다며 안내해 주었다. 전망대에 올라와 선글라스를 벗었다. 선글라스의 색이 처음 보는 이 만연한 초록색을 온전히 눈으로 담는 것을 방해하는 것 같았다.




베른 터미널에 도착했다. 시내 중심으로 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버스 정류장이 있었다. 스위스 교통패스를 처음으로 사용하는 순간이었다. 버스가 도착했는데 무슨 일인지 버스기사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문 앞에 서있어도 아무리 인기척을 내도 내 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내가 너무 작아서 눈에 띄지 않는 것도 아닐 텐데. 그는 한참 무언가를 하더니 일어나 뒷문으로 내려 대합실로 사라졌다. 나는 가방을 잠시 내려놓고 멍하니 버스 앞에 서있었다. 2시 정각이 되자 사라졌던 버스기사가 다시 나타났다. 나는 버스에 올라타 스위스 교통패스를 보여주었다. 사실 그때는 몰랐다. 스위스의 철저한 시간관념을. 모든 기차와 버스 트램등 한 치의 오차 없이 정해진 시간에 움진인다. 시간관념이 예민한 나에게 여행계획을 편히 짤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6 정거장이 지나 베른 시내에 내렸다. 그리고 계획에도 없던 베른을 여행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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