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른
카키색 건물들이 같은 옷을 입고 있는 듯 거리에 서있다. 자동차와 트램의 위쪽으로 전깃줄이 복잡하게 지나다녔지만 나름의 질서가 존재했다. 도시인 것 같으면서 도시 같지 않은 처음 느껴보는 이곳에 이끌려 장거리 이동 탓에 지친 몸이었지만 인터라켄의 숙소 체크인을 조금 미루기로 결정했다.
역을 찾아 조금 걸었다. 역 안에 짐을 보관하고 돌아다니기 위해서다. 무거운 짐을 들고 빠른 걸음을 걷는 사람은 나뿐이다. 모두 얼굴의 표정이나 행동에서 여유가 느껴진다. 큰 역이 자리하고 있는 도시에서 여유와 평화로움이라는 단어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짐 보관소를 찾아 역 안 이리저리를 돌아다녔다. 거대한 식물원에 온 듯 건물 안에서도 새소리가 들렸다. 새가 정말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프랑스의 여행과 확연히 다른 점이라면 소매치기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그것만으로 여행자의 마음은 편안해졌다.
인터넷에서 찾아본 역 안의 락커는 신형과 구형이 있다. 신형 락커는 카드 결제가 가능하지만 구형락커는 현금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 때문에 신형락커를 찾아다녔다. 서울역처럼 여러 기차들이 환승하는지 역의 규모가 커서 꽤 많이 걸어 다녔다. 락커 찾는 시간이 너무 길어져 용기를 내 안내소에 짐보관소의 위치를 물어보았다. 건물 안이나 타고 왔던 버스까지 반려견과 같이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디든 사람이 다니는 곳은 편하게 동행할 수 있는 것 같았다.
짐보관소를 찾았다. 대형 캐리어가 들어가는 락커에 가방을 넣었다. 9프랑, 락커의 비용은 한화로 13000원이었다. 스위스의 물가가 폭력적인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잔인할 줄은 몰랐다. 스위스에 도착한지 한시간도 되지않아 내 지갑은 벌써 크게 한방 먹었다. 하지만 무거운 배낭에서 해방된 나는 몇 시간 만에 완벽한 자유를 얻은 것 같았다. 베른의 구시가지로 향했다.
베른 감옥탑, 스위스 연방궁전, 장미 정원, 아인슈타인 하우스, 곰공원등 관광할 곳이 많았다. 새똥의 흔적을 제외하면 거리에 돌아다니는 쓰레기 하나 없이 깨끗했다. 스위스는 도시 어느곳에서 나오는 물은 식수로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베른 감옥탑으로 걸어가는 길에 벼룩시장이 열렸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 잠시 멈춰서 구경했다. 수공예품등이 많았다. 스위스의 벼룩시장의 물가도 상상을 초월했다. 스위스는 거대한 벼룩이 있나보다.
베른 감옥탑 밑으로 트램이 지난다. 중세 시대 때 범죄자들을 수용했지만 지금은 행사나 전시회가 있을 때만 내부를 개방한다. 카키빛이 도는 건물의 색과 그 밑을 지나는 트램의 색이 예쁘게 잘 어울렸다. 트램이 지나다니는 도시는 익숙지 않아서 트램길을 밟고 지나가도 되는지 한참 망설였다. 베른 감옥탑을 지나면 연방궁전이 정면으로 보인다. 연방궁전 테라스에서 베른의 마을을 내려다볼 수 있다고 한다.
연방궁전 옆으로 사람들이 지나다닐 수 있는 길이 있었다. 입구에 드러서자마자 건물의 아치 사이로 드러나는 풍경에 말을 잇지 못했다. 전망대 주변엔 벤치가 많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망대 벽 쪽에 붙어서 경치를 구경했다. 에메랄드빛 강물이 흐르고 빨간 벽돌색의 지붕들이 촘촘히 서 있었다. 집 하나하나를 전부 구경하고 싶을 정도로 집이 예뻤다. 아름다운 풍경을 멍하니 보다 보면 가끔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모든 것이 고요해지고 마음이 평화로워질 때 내 감정을 들여다볼 수 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내가 여행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한다.
이런 곳에 있으면 길 가다 아무나 붙잡고 사랑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이루어질 것만 같다. 미친 짓이라 생각에만 그쳤다. 프랑스에서 기차를 타고 인터라켄으로 바로 갔다면 베른을 여행할 기회가 없었을 것 같다. 예상치 못한 즐거움에 또 한 번 여행의 매력을 느낀다. 궁전 광장 앞에는 음식을 파는 상점들과 푸드트럭이 서 있었다. 분수대 앞의 물을 정말 마셔도 되는지 망설이고 있을 때 푸드트럭 앞에 핫도그를 먹던 아저씨가 내 어깨를 치며 시범을 보였다. 아저씨가 웃으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자 나도 안심하며 물통에 물을 담았다. 도시 전체가 약수터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처음에 스위스 교통패스가 너무 비싸서 고민을 많이 했지만 와서 돌아다니다 보니 그런 생각들은 금방 씻겨 내려갔다. 여행을 계획한 일주일 동안 정말 꽉꽉 채워 여행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베른은 구시가지 전체가 유네스코에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구시가지를 조금 걷다보면 과연 유네스코의 선정 기준이 정확하다라고 생각이 든다. 영국과 프랑스의 여러 곳을 다녀 보았지만 베른은 내가 가장 사랑할 것 같은 도시다.
장미 정원까지 쭉 늘어선 구시가지 길에는 여러 상점가들이 있었다. 아인슈타인 하우스는 내부 관람의 평점이 좋지 않아 1층의 기념품을 파는 상점만 간단히 구경했다. 그리고 베른에서 유명한 젤라토 집을 찾아갔다. 스위스에서 먹는 간식은 이걸로 끝내야 한다. 디저트 하나가 다른 나라에서 두 끼를 해결할 수 있는 가격이다.
젤라토를 판매하는 La golosa에 도착했다. 두 가지 맛이 콘에 올려지는 미디엄 사이즈는 한화로 9프랑이다. 티라미수맛과 조금은 느끼할 수 있는 맛을 중화해줄 레몬맛을 골랐다. 맛은 물론 훌륭했다.
오랜 시간 동안 과자로 끼니를 해결했던 터라 레몬맛의 젤라토가 텁텁한 속을 상큼하게 만들어 주었다.
장미정원 전망대에 올라 마을을 바라보는데 시계탑에서 종소리가 들렸다. 평화롭다는 건 이 도시뿐만이 아니라 내 마음 상태 이기도 하다. 어느새 여행을 시작한 지 3주가 되어 간다. 출발 전의 불안했던 마음들은 이곳에서 경험들로 채워지면서 휘발되어 간다. 어딜 가든 좋은 사람과 좋은 경험을 함께할 기대감이 든다. 계획을 바꿔 도착한 이곳에서도 많은 추억들을 쌓아간다. 나중에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오고 싶다. 지금 느꼈던 감정을 나눌수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