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왕국을 갖는 것
센강을 지나 파리의 중심에서 서쪽으로 걸었다. 애플워치는 오늘 활동량에 대한 만족의 알림을 보냈지만 눈에 치이는 모든 것이 아름다워 다리 아픈 것도 잊었다. 편의점을 찾다가 스타벅스로 들어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없어 얼음이 들어간 다른 커피를 추천받았다. 캐러멜 시럽이 들어간 커피였다.(캐러멜 마끼아또의 맛은 아니었다.) 역시 프랜차이즈의 커피맛은 나쁘지 않다. 항상 평균이상의 만족을 준다. 오랜 시간 걷다 달달한 커피가 몸에 들어오자 피가 빨리 도는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얼음이 들어간 커피는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다시 숙소를 나설 때의 체력으로 내 몸을 각성시키는 것 같았다.
길을 걷다 중고 서점을 만났다. 사람들이 매대에 달라붙어 책을 고르고 있었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은 잠시 서점에 들러 이런저런 책을 둘러보고 책을 열었다. 아무 페이지나 열어 책의 문장이 마음에 들거나 술술 읽히는 느낌이 들 때, 책은 주황색 바구니 안에 담겼다. 책은 사람들에게 어떤 모양으로든 영감이 될 기회를 다시 한번 얻는다. 프랑스에선 책을 읽지 않으면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소외된다. 우리나라에서는 드라마나 예능을 보지 않고는 대화 주제를 찾기 어려운 것처럼. 같은 의미로 프랑스에선 책을 읽지 않고는 이야기할 거리를 찾기 힘든 모양이다. 파리 시내 어디서든 책을 읽는 사람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센강변에 도착했다. 어제 바토무슈로 지나갔던 곳이다. 강변도로가 좁아 러닝 하는 사람과 관광객이 복잡하게 엉켰다. 퐁뇌프 다리 건너 루브르 박물관이 보였다. 루브르 박물관을 들어갈 마음은 없었지만 유리 피라미드를 구경할 겸 퐁뇌프 다리를 건넜다. 중국사람이 디자인한 파리의 랜드마크는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다. 유리 피라미드를 설계한 사람은 중국의 건축가이다. 파리에서 여러 시안을 보고 결정한 일이지만 시민들의 반대가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는 파리 어느 곳보다 유명한 랜드마크가 되어있다. 위로 솟아 있는 피라미드와 안으로 떨어지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는 피라미드는 동양의 음과 양을 상징한다. 건축가도 훌륭한 직업인 것 같다. 자신이 만든 세상에 들어가 보는 경험은 어떤 느낌일까? 시간이 지나 다시 방문했을 때 자신이 원하는 의도대로 건물이 사용되고 있다는 것도 감동적인 일일 것 같다.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만든다는 것에 있어 건축가도 훌륭한 예술가다. 루브르로 들어가는 길에 버스킹 하는 사람이 있었다. 건물이 소리를 반사 해, 콘서트홀처럼 노랫소리가 퍼졌다. 버스커의 노래가 희미 해질 때쯤 유리 피라미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피라미드가 잘 보이는 곳을 찾아 앉았다. 피라미드의 꼭짓점을 잡는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있었다. 경쟁이라도 하듯이 피라 미드가 제일 잘 잡히는 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들은 사진을 확인하고 다시 포즈를 취하는 행동들을 수차례 반복하고, 일행은 찡그린 얼굴을 숨기고 계속해서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원하는 사진에 성공한 사람들은 그제야 모나리자를 만나러 가는지 아니면 모나리자는 사실 목적이 아니었는지, 사라졌지만 그 자리는 곧 다른 사람들로 채워졌다. 나는 가끔 무언가를 남겨야 하고 의미를 찾는 강박에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 강박의 대부분은 타인의 시선을 기준으로 나를 생각할 때 생겨나는 것 같다. 돈이냐 명예냐라는 질문에도 둘 다 선택하고 싶지 않다. 돈도 명예도 타인이 정한 기준에 나에게 주는것이기 때문이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았지만 먹구름 사이로 해가 조금씩 유리 피라미드에 걸치고 있었다. 그 순간 내 이어폰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고 이런 멋진 곳에서 여유를 즐기고 있음에, 나는 아직도 무언가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는 걸 느낄 때 장소에 대한 추억이 생기고 의미가 된다. 그것은 내 안에 있고 오롯이 나만 느낄 수 있다. 이런 감정의 캐비넷을 가지고 있는것이 나에게 의미가 있다. 생각날때 그 서랍들을 열어 꺼내 보면서 추억할수 있다는게 내 삶에서 가장 즐거운 일이다.
루브르 박물관은 콩코드 광장을 마주 보고 있었다. 서로를 이어주는 뛸르히 정원은 잠깐 내린 비 때문에 질척 거렸지만 콩코드 광장의 오벨리스크를 구경하기 위해 그곳을 지났다. 뛸르히 정원을 온전히 가로질러 걷는 것은 처음이었다. 자연마저 통제한다는것은 각진정원이 아니어도 공원의 규모 만으로 모든 것을 압도하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파리는 걸으면서 여행하기 좋은 곳이라는 게 느껴졌다. 서울엔 오랫동안 걸으며 관광할 수 있는 공간이 드문 것 같다. 강과 강 사이를 다리로 쉽게 걸을 수 있는 게 좋았다. 차가 없는 것도 좋았다. 계속 뒤를 신경 쓰면서 걷지 않는 것은 내 시신경을 온통 편한 마음으로 아름다운 것에 둘 수 있었다.
오벨리스크가 보이기 시작했다. '룩소르 오벨리스크'가 보인다는 것은 콩코드 광장에 가까워졌다는 이야기다. 룩소르 오벨리스크는 이집트가 선물한 돌기둥이다. 약탈했다고 했다면 또 울컥할뻔했지만. 기둥에는 이집트의 상형 문자가 세겨져 있었다. 살짝 빛나는 것 같은 황금빛 꼭대기가 아름다웠다. 그 오랜 옛날에 몇백 톤은 나가 보이는 저 기둥을 이집트에서 어떻게 가져왔을까라는 의문이 생겼다.
다시 센강 부근으로 왔다. 마레 3 지구에서 걷기 시작해 콩코드 광장까지 3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알렉산드로 3세 다리로 향하는 센강변에는 샹젤리제에서 봤던 거리의 나무들처럼 킬각을 맞춘 조경이 되어 있었다. 이쯤이면 저런 계획을 한 사람은 변태임이 틀림없다는 합리적 의심이 든다. (그 정도로 반듯하다) 알렉산드르 3세 다리의 황금빛 조각이 보이기 시작했다. 흐린 날씨엔 유난히 이런 조각물들이 더욱 눈에 띈다.
스위스로 떠나기 전 파리 시내를 둘러보며 복잡한 마음을 정리했다. 파리에선 소중한 사람들의 대한 추억으로 점철된 기억을 가져간다. 파리는 꼭 다시 와보고 싶은 곳이다. 소중한 사람과 같이 여행을 하고 싶다. 여행이 3주 차로 접어들면서 처음 오기 전 목표에 대한 불안감이나 외로움들이 다시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나라를 이동하기 전의 불안감과 겹쳐 그런 것 같다. 영국을 거쳐 프랑스까지 매번 내 시간을 견디게 해 준 것은 사람들이었다. 운이 좋게도 좋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여행을 잘 이어가고 있는 것 같다.
이번엔 어떤 인연을 만날까라는 생각을 하며. 이제 스위스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