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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9 몬레알레 가는 버스

이탈리아여행

by 배심온

37번 아가씨로 자신을 소개하는 대학 선배가 있었다. 자신이 타고 다니는 버스 번호라고 했다. 289는 내가 타고 다녔던 버스 노선이다. 몬레알레에 가려면 389번 버스를 타야 한다.


이 버스를 타기까지 우리는 또 우여곡절을 겪는다.


동료에게 나는 여행의 기술을 전수받고 있다. 새로운 도시에 도착하면 우선 그 도시의 중앙역을 찾아가서 주변 도시로 가는 기차와 버스가 있는지를 확인하고 기차표를 예매하거나 미리 시간표를 확인해두어야 한단다. 그래야 안심하고 그 도시를 즐길 수 있고, 다음 일정을 구체적으로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동료는 늘 여행의 전체를 보며 일정이 무리 없이 진행되도록 신경을 쓴다. 정말 믿음직스럽다.


팔레르모에 도착해서도 먼저 중앙역을 찾아가 체팔루로 가는 기차표를 예매하고, 아그리젠토행 기차 시간을 확인하고, 카타니아로 가는 버스표도 미리 사둔다. 그런 후에 팔레르모를 즐기러 콰트로칸티로 걸음을 옮긴다.


레알레로 가는 버스표도 역시 중앙역에서 구입했는데, 표를 파는 아저씨와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알려주는 승차 장소가 서로 달랐다. 우리는 표를 판 아저씨가 가리키는 곳에서 109번 버스를 탔다. 10분쯤 지났을까 버스 안내원으로 보이는 청년이 너희들 어디 가냐고 묻는데, 우리가 실수를 했다며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아마도 그 버스는 몬레알레를 돌아 나와 종점으로 가는 버스인 듯했다. 안내원은 미스테이크를 여러 번 언급하더니 가능한 방법을 동원해 주었다. 다른 버스 기사에게 설명을 덛붙여 우리를 인계했는데, 인계받은 기사는 또 안 되겠다며 다른 버스에 타도록 안내했다. 시내로 몇 분 달리던 버스 기사는 나를 부르더니 뭐라고 말하는데, 뜨레라는 소리 말고는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다. 기사분은 운전을 하면서 조심스럽게 종이에 무엇인가를 적어서 내게 건네며 지금 내리라고 한다. 레몬이 그려져 있는 휴지에는 389라고 적혀있다.


아하, 지금 내려서 389 버스를 타라고?


땡큐를 반복하며 손까지 흔들면서 버스에서 내린다. 버스 문이 닫힌 후에도 기사에게 손을 흔들어 감사의 마음을 표하고, 그도 흐뭇한 미소로 답한다. 땡큐 말고 그라찌에라고 했으면 더 좋았을 걸.


우리는 그곳에서 389 버스를 타고 무사히 몬레알레에 도착했다. 이쯤 되면 스스로의 무식함에 좌절하고, 무모함에 겁을 집어먹어야 할 텐데, 우리는 오히려 이런 게 여행이라며 팔레르모 사람들의 친절에 감사할 뿐이다.


레알레 대성당을 본 후로는 다른 성당에 들어갈 생각을 안 한다. 그만큼 화려하고 아름답고 완벽했다. 금 2200kg이 성당 내부를 장식하는 데 사용되었다고 한다. 더구나 높은 언덕 마을에 자리 잡고 있어서 팔레르모 시내를 한눈에 다 내려다볼 수 있다. 동료는 대성당을 둘러싼 언덕 위로 띄엄띄엄 박혀있다시피 하는 집들을 구경하러 골목으로 스며들고, 나는 수도원 회랑을 혼자 걷는다. 한 시간의 개인시간을 가진 후 2시 반에 문을 여는 대성당을 같이 구경하기로 한다. 수도원 회랑 입장료는 8유로, 대성당 입장료는 12유로다.


레알레 수도원의 정원은 아랍식으로 꾸며져 있고, 앙징맞게 작은 열주들이 두 개씩 짝을 지어 96개가 사각형의 중정을 둘러싸고 있다. 네 모서리 중 한 곳에는 파피루스 나무를 조각한 기둥을 가운데 두고 조그마한 분수가 만들어져 있다. 물을 먹고 있는 비둘기가 날갯짓을 할 때마다 그 소리가 메아리치듯 크게 울린다.


기둥은 사선으로 홈을 파 그 안을 모자이크로 장식한 것도 있고, 동식물로 화려하게 조각해 놓은 것도 있고, 어느 것 하나 같거나 보잘것없는 것이 없다. 아치형 구조물과 기둥이 맞닿는 곳에는 온갖 서로 다른 조각들이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수도원 회랑을 거니는 사람들은 다들 이어폰을 통해 조각에 대한 해설을 듣고 있는데, 한국어가 지원될 리 없으니 나는 오직 내 감각에만 집중하여 하늘을 올려다보며 조각들을 살필 뿐이다. 눈이 부시고 고개가 아프다.


성당을 신에게 봉헌하는 모습, 예수님과 열두 제자, 아담과 이브, 뱀의 유혹을 받는 이브, 사자와 싸우는 용사, 책을 읽는 학자들, 화살에 맞은 말, 풀을 뜯는 양 떼, 종려나뭇잎, 거꾸로 물구나무 선 남자, 심지어 서로 머리채를 붙들고 있는 두 남자 등 조각은 한 개도 같은 것이 없었으니, 이 회랑을 걸었던 수도사들에게 기도의 주제가 되었으리라.


나도 천천히 회랑을 돈다. 세 바퀴. 열주의 숫자가 96개. 작은 분수의 기둥 12개와 합치면 108개가 된다. 나의 알량한 지식으로 108 번뇌로 연결 짓는다. 그러나 한번 더 회랑을 돌면서 세어본 기둥의 수는 또 97개니, 한번 더 돌아 정확한 개수를 확인하고 싶다. 이건 또 웬 집착이란 말인가!


이제 동료와의 약속 시간 때문에 그만 수도원 회랑을 나가야 한다. 혼자서 수도원 회랑을 걷는 시간은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2025.3.12. 수요일.

몬레알레 대성당을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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