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여행
VENDE
시칠리아 소도시 골목길에서 자주 보는 글자라 확인해 본다. 팔다, 판매하다로 번역된다. 라구사에는 유독 이 표시가 많다.
어제는 초콜릿 도시 모디카에서 놀다가 라구사 숙소로 돌아왔다. 라구사에서 버스로 20분 정도 걸리는 가까운 마을인데도 풍광은 좀 다르다. 모디카에서는 줄 맞춰 이동하는 유치원 아이들도 보이고, 단체 여행을 온듯한 학생들도 심심찮게 보인다. 도로를 따라 파라솔이 펼쳐져 있고, 햇볕을 즐기며 차를 마실 공간도 많다.
5유로에 45분 동안 동네 한 바퀴를 도는 꼬마열차를 타고 마을을 우선 스캔한다. 흥겨운 음악에다, 중요 건물마다 리드미컬한 이탈리아어로 설명을 해주니, 마을 구경을 시작하는 데는 적격이다.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지만 파파고에 의지할 생각은 애초에 접는다. 우선 보고 느끼는 게 더 중요하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궁금한 건 숙소에 가서 검색해 보면 될 일. 이 순간을 놓칠 수는 없다. 꼬마기차로 돌았던 곳을 다시 천천히 걸으며 모디카 마을을 음미한다.
모디카와 라구사는 1693년 시칠리아에 있었던 지진 이후에 당시 유행했던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된 마을이다. 가까운 이웃 마을이지만 라구사는 모디카보다 더 높은 지대로 올라가야 하고, 깊은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윗마을과 아랫마을로 나뉘어 있다. 라구사 아랫마을이 신도시인데 비해 우리가 머무는 윗마을은 구도시라고 할 수 있다. 바로크 양식의 성당과 건물들이 많이 남아있어서 라구사 이블라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라구사 이블라는 조용하다. 할아버지 몇 분만 보일 뿐, 사람 구경하기 어렵다. 주말에는 사람들이 좀 더 있으려나. 계란과 양파, 그리고 맥주 한 병을 사러 대성당까지 걸어간다. 바로크 앙식의 정수라고 하는 성조르지오 대성당을 지나 그 앞 광장의 내리막 길에 있는 슈퍼에서 우리는 저녁거리를 장만한다. 계란에 양파를 썰어 넣어 김말이를 하고, 카타니아에서 산 피스타치오와 튀니지에서 남은 돈으로 장만한 치즈가 우리의 저녁식사다. 그리고 맥주 한 병. 이거면 충분하다.
숙소에서 라구사 대성당까지는 왕복 삼십 분이 안 걸린다. 해가 지는지 마을은 더욱 부드러운 빛으로 가라앉고, 골목골목에는 'VENDE'라고 적힌 건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화려한 바로크 양식의 건물이나 성당보다 그 글씨에 더 마음이 가는 건 왜일까? 마을의 정막함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교회나 버스 정류장 앞에 인물사진과 함께 날자와 시간, 장소를 알리는 공지가 여러 장 붙어있다. 누군가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다. 구멍가게도 찾아보기 힘들고, 반찬 가게도, 빵집도 찾기 힘든 이 높은 골짜기 마을에 젊은이와 아이들이 살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나이 든 노인들만 살다 보니 그들이 죽었다는 부고가 몇 개씩 한꺼번에 뜨고, 그들이 떠난 빈집은 VENDE 물건으로 나오는 것이다.
언젠가 시칠리아 집을 1유로에 판다는 기사를 보았다. 300년도 더 된 집들이니 수리는 필수고, 자비부담이다. 일정 기간 내에 수리를 하지 않으면 보증금을 떼인다.
이틀간 머문 숙소의 문밖은 바로 성당이다. 나는 숙소의 공용부엌에 나와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부엌에서는 성당의 파란색 돔이 눈앞에 보인다. 기도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무탈하고 겸손하게 여행을 계속할 수 있게 해달라고 또 나의 안위를 빈다.
라구사는 특별하다. 지극히 조용하여 다른 행성에 와 있는 느낌이다. 사라져 가는 도시.
2025. 3.22. 오전 10:30.
포찰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포찰로에서 몰타로 가는 배를 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