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우씨의 '달내마을' 이야기(154)
피치 못할 사정으로 도시 아파트와 산골마을을 왔다 갔다 하며 생활한다. 귀찮기도 하지만 좋은 점도 꽤 된다.
우선 시골과 도시 양쪽의 맛을 다 볼 수 있다. 마침 도서관이 아파트 바로 옆이라 필요한 일을 거기서 처리할 수 있고, 또 밥 해 먹기 귀찮으면 스무 걸음 남짓 떨어진 식당에서 만 원으로 해결하고. 편의점도 경비실 바로 곁이다.
애로사항이야 시골까지 차를 좀 오래 몰아야 한다는 점. 차 모는 걸 좋아하니 그건 관계없으나 기름값이 올라 비용이 늘어나니 걱정. 또 요즘엔 이삼일만 집 비워도 불기가 완전히 사라져 새로 난방해야 하니 데워지는 동안 추위를 참아야 한다.
이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그 시간에 땀날 정도로 일하면 될 터. 아니면 추위 이기는 동계훈련으로 여겨도 되겠고.
며칠 전 언양읍 남천(태화강 상류) 주변을 운동 겸 산책 삼아 걸으며 갈대밭을 보았다. 거기는 세 계절이 다 갈대가 울울창창하다. 반년 넘게 푸릇푸릇한 갈대가 살짝 옷을 벗을 즈음이라 개울로 눈을 주니 새가 제법 많아졌다. 분명 전 주보다 많아 보인다.
풀과 나무가 만들어내는 자연의 배치도 봄 여름 가을에는 쏘물다가 겨울이 다가오면 성기는 게 이치건만 개울의 새들만은 정반대인가 보다. 여태 갈대만 쏘물 뿐 휑뎅그렁하게 비어 있던 개울에 새들이 제법 모여 들었다. 언제 저렇게나 많아졌을까. 기온이 내려가면서 시나브로 하나둘 모여 들었나.
가만 생각하니 텃새가 불어난 것 같지 않고 겨울철새 때문이 아닐까. 아직 본격적 철새 이동이 시작되려면 좀 남았는데 전초병으로 온 녀석인가. 하기야 작년에도 보니 이맘때부터 점점 늘어났으니 말이다. 길고 큰 카메라를 어깨에 걸친 탐조가들이 슬슬 늘어날 때가 이 시점이다.
작년에도 여기서 왜가리, 쇠백로, 물닭, 검둥오리, 논병아리, 넓적부리, 청둥오리, 원앙을 보았다. 다른 새도 보았지만 이름을 모르니 패스. 이들 모두는 예전에는 철새였지만 기후와 지형 등의 변화로 텃새로 된 새도 있고, 여전히 철새로 계절 바뀌어야 날아오는 새도 있다.
철새와 텃새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여름철새는 여름 기후에 맞도록 진화해 왔고, 겨울철새도 마찬가지다. 즉 그 계절에 딱 맞춰 생활하도록 돼 있다. 그럼에도 이제 왜가리나 쇠백로를 철새라 잘 부르지 않는다. (아직 이 둘 가운데 철새로 날아드는 새가 많건만)
철새와 텃새의 차이는 기후뿐 아닌 기질 면에서도 다르다. 철새는 최소 2,500km에서 최대 12,000km까지 날아가야 한다. 그 먼 거리를 날아가려면 체력 못지않게 도전정신도 갖춰야 한다. 우리는 그냥 ‘본능이니까’ 하는 말로 퉁치지만 얼마나 두려울까. 그 두려움 이겨낼 용기 체력 없으면 불가능하니.
그에 비해 텃새는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신경 써야 할 건 단지 인간뿐. 사람 눈치만 슬쩍슬쩍 보면서 한 곳에 붙박여 살면 그만. 몇 년 살다 보면 어떤 계절에는 어떤 먹잇감이, 어디에 위험물이 있는 줄 다 아니까 모험, 용기 이딴 건 바람에 날려 보내면 된다.
그러다 신기한 걸 보았다, 왜가리가 왜가리를 공격하는. 덩치가 비슷한데 싸우다니. 혹 암컷 서로 차지하려는 사랑싸움인가. 얼마 전 철새 전문가에게 들은 말이 생각난다. 같은 종이라도 텃새가 된 철새는 계절 바뀌어 찾아오는 진짜 철새를 싫어한다나. 설마?
그럼 내가 본 장면은 수컷끼리 암컷 쟁탈전이 아니라 텃새 된 왜가리가 철새인 왜가리를 밀어내는 장면이란 말인가. 내 능력으로 알 재간은 없다. 게다가 영상으로 찍으려 했으나 휴대폰 성능 때문인지 거리가 워낙 멀어선지 안 잡힌다.
텃새가 된 왜가리가 그리 했다면 문제가 크다. 왜냐면 텃새가 텃세를 부렸으니까. 텃세 부려선 안 될 놈이 텃세 부렸으니 참 괘씸하다. 저도 이주해 온 주제에. 시골 논 가까이 가다 보면 왜가리나 쇠백로가 다리에 힘주며 꼿꼿이 선 경우를 자주 본다. 텃새인 참새, 박새, 곤줄박이 같은 작은 새들은 근처에 얼씬도 못한다. 덩치에서 기죽으니까. 그러니 텃새라 해도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못 간다.
귀화식물이 토착식물을 밀어내고 그 자리 차지한 얘기는 뉴스를 통해 많이 듣고 봤으리라. 가시박, 도깨비바늘, 돼지풀, 서양민들레... 이 녀석들은 우리나라 곳곳에 퍼져 있다. 어디든 막무가내 밀고 들어가 떡 하니 자리 잡음으로써 토착식물을 쫓아낸다.
귀화식물은 새로 말하면 철새였다가 텃새가 된 경우에 비유할 수 있으리. 어디 식물과 조류뿐이랴, 파충류와 어류도 마찬가지다. 황소개구리, 블루길, 배스 같은 녀석들이 이미 못이나 강을 점령한 지 오래다. 어떤 곳에는 토종어류를 아예 한 마리도 찾아볼 수 없다나.
뿐이랴, 철을 알아 철 따라 다니던 철새는 이제 '철 모르는 새'로 탈바꿈해 진짜 토박이 텃새를 위협한다. 적반하장이 따로 없다.
새들만 그러는 줄 알았는데 사람도 마찬가지다. 선거철만 되면 철새들이 거주지 불명의 곳에서 날아들어 주인 행세하는 경우를 흔히 보니까. 또 달리 행복한 전원생활 꿈꾸며 시골로 옮기면 텃새가 이주민들에게 '마을발전기금'이란 명목으로 돈을 뜯어내는 등 엄청난 텃세를 부린다.
이와는 달리 텃새(토박이)보다 철새가 더 많아 텃새들이 꼼짝 못하는 곳도 생겨났다고 한다. 주말만 드나든 철새였다가 텃새가 되었다. 앞으로 대다수의 시골이 이렇게 변하리라. 지금처럼 텃새가 텃세 실컷 부려도, 철새가 적반하장으로 텃새 무시해도 시골살이가 불편해지긴 마찬가지지만.
철새와 텃새가 함께 어울려 사는 세상은 올 것인가. 사람의 세계든 새의 세계든.
*. 새 사진은 모두 출처를 밝히지 않아도 되는 pixbay의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