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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 마흔 포기

목우씨의 '달내마을' 이야기(28)

* 배추 마흔 포기 *



월요일(2018년 12월 10일) 저녁,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받으니 우리 부부랑 가장 가깝게 지내는 아랫집 가음댁 할머니셨다.

“선상님, 김장 했능교?”

“네, 지난 토요일 했습니다.”

“아이고 마, 나가 늦었삔네.”

“왜 그러시는데요?”

“김장 안 했시몬 배추 갖고 가라 칼랬는데...”

하고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필요한 사램 있시몬 한 마흔 포기 남았으니께 그냥 갖고 가라 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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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이어진 할머니의 말씀을 정리하면 이렇다.

원래 배추를 아들네 딸네 줄 것만 심으려 했는데, 밭이 넓어 있는 대로 다 심었단다. 금(가격) 좋으면 팔기도 하려고. 헌데 올해 배추 가격은 아시다시피 폭락. 그래도 장에 갖다 파시라고 하자, 워낙 배추값이 떨어져 돈이 안 된단다.

하기야 한 포기 잘 받아야 천 원이라 하니 마흔 포기 다 팔아야 4만 원 될까. 그마저 시장까지 운반하려면 택시 불러야 하고 그러면 수입의 반이 날아가고. 또 안 팔리면 무작정 추운 장터에 찬바람 맞으며 쪼그리고 앉아 있어야 하고... 그래서 팔기를 포기하고 아는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나눠주고도 마흔 포기 남았단다.


나는 귀가 번쩍 띄었다. 마흔 포기를 아는 이들에게 인심 쓰면 얼마나 좋은가. 시골 살면서 제대로 농산물 나눠줘 본 적 없었으니... 그래서 아내에게 얘기했다. 시간 내 배추 뽑으러 가자고. 그런데 아내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아, 또 일 벌이려 하네.”

“일 벌이다니?”

“요즘 배추 공짜 준다고 해도 가져갈 사람 없어요.”

“왜 다들 김장하잖아.”

“이미 김장 다했고, 안 했다 하더라도 절임배추 공짜로 준다면 몰라도 생배추는 반가워 안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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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아내로부터 들은 얘기다.

김치를 사 먹는 집이 늘어나 김장 안 하는 집이 태반이고, 또 힘 덜 들게 배추 절이는 과정을 생략하려고 절임배추 사다가 한단다. 생배추는 쌈 하려고 두어 포기 원할까 마흔 포기나 가져갈 사람 없다고. 또 막상 공짜로 가져가라 하지만 어떻게 염치없이 그냥 가져갈 수 있느냐고.

결국 아내 말의 요지는 내가 오지랖 넓게 별로 환영받지 않은 일에 끼어들었다는 투였다. 모처럼 좋은 일 하려다 머쓱해졌다. 그래도 한 번 마음먹은 일, 사나이가 칼을 뺐으면 배추 뿌리라도 잘라야지. 더욱 남는 게 시간뿐인 처지 아닌가.


화요일엔 비가 와 배추 뽑으러 가는 걸 포기하고, 수요일엔 기온이 너무 내려가 포기하고, 목요일인 어제 할머니를 찾아갔다. 정말 아는 사람들에게 그냥 갖다 줘도 되냐고 하자 할머니는 아주 편하게 말씀하셨다. 어차피 가격 안 좋아 팔지 못하고 그냥 밭에 썩힐 바에야 누구라도 뽑아가는 게 당신을 돕는 일이라고.

저대로 두면 밭만 지저분해지고 밭이 비어야 내년 대비해서 거름을 갖다 넣을 수도 있다고. 그리고 돈은 절대로 받지 않을 테니 필요한 사람에게 다 갖다 주라고. 시골에 살고 있지만 농사짓고 살지 않음을 이럴 때 참 다행으로 여긴다. 애써 지은 농산물을 밭에 그냥 썩혀 버려야 할 경우를 당하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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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투사니들의 속이 얼마나 상할지는 불을 보듯 환하다. 김치 담글 정도 크기의 배추를 만들려면 일단 밭을 갈아야 하고, 거름을 준 뒤 씨앗을 뿌리고, 약을 치고 비료도 뿌리고, 풀도 뽑고... 일이 좀 많은가. 그런데 팔 수 없어 버려야 하니.

올해는 감도 대풍이다. 달려도 너무 많이 달렸다. 역시 돈이 안 된다. 한 접에 만 원 받기도 힘드니... 돈이 안 되니 따지 않아 집집마다 감나무에 감이 그대로 달려 있다. 이 감들이 요즘 길바닥을 황칠한다. 나뭇가지에서 얼었다 녹았다 반복하면서 저절로 떨어지는데 그 녀석들이 길바닥을 벌겋게 만든다. 홍시는 맛있어도 아스팔트에 곤죽이 돼 떨어진 홍시는 참 볼썽사납다.



이번 참에 한 가지 얘기하련다.

할머니는 농산물을 이제는 장에 팔러 가지 않는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몇 년 전 도라지를 팔러 갔을 때 겪은 일이라면서 얘기해 줬다. 옆에서 1kg에 12,000원 하는 걸 보면서 할머니는 10,000만 받아도 되겠다 싶어 그렇게 팔려고 했는가 보다.

얼마쯤 있자 제대로 옷을 갖춰 입은 도시 아주머니 한 사람이 오더란다. 가격을 묻기에 만 원하고 불렀더니 그 아주머니가 대뜸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어머, 왜 이리 비싸요?”

전혀 예상 못한 반응에 할머니가 대답을 못하고 있으니까,

“오천 원에 팔아요!” 하는 게 아닌가.

너무 엉터리없는 가격에 놀라 역시 대답을 못하고 있으니까,

“오천 원 됐지요?” 하고는 주섬주섬 주워 담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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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할머니는 장에 가 파는 일을 포기했다. 그때 할머니가 이렇게 말했던 게 기억난다.

“우찌 사램이 그리도 깎을 수 있능교? 슝악해도 너무 슝악해서...”

시골장터에서 할머니가 내놓은 농수산물 깎아서 헐하게 샀다고 자랑하는 사람을 가끔 본다. 물론 할머니들 가운데 정말 장사꾼도 있다. 허나 순박한 할머니들에겐 고개 절레절레 흔들게 하지 말았으면 한다. 자칫하면 '흉악한' 사람으로 낙인찍힐지 모르니까.



어제 아내더러 함께 배추 뽑자고 하면 잔소리 들을까 봐 혼자 밭에 가 뽑아서는 겉잎 다 떼고 제법 번듯하게 손질해 집에 갖고 왔다. 대충 어림으로 보아 중품에 해당하는 배추가 스무 포기, 하품에 해당하는 배추가 스무 포기다. 이 정도면 됐다 싶어 아는 이들에게 전화를 했다. 그런데 반응이 별로다.

다들 김장을 했다거나 쌈배추용으로 한두 포기는 원해도 무더기는 감당할 수 없단다. 또 어떤 이는 필요는 하나 차가 없다 하고... 지금 우리 집 창고에 '까촌남(까칠한 촌 남자)'이 손수 다듬어 놓은 배추 마흔 포기가 그대로 있다. 배추도 서러우리라.


자기 꿈(?)은 고추와 마늘과 젓국과 갈치와 만나 입맛 돋우는 김치로의 변신일 텐데, 사람들에게 외면당했으니 말이다. 내가 비록 배추를 무지무지 좋아하지만 혼자 배추쌈, 배춧국, 배추전, 배추 샤부샤부 다 해 먹기엔 너무 많다. 예쁘게 몸단장한 배추가 이내 다른 주인에게 분양되기를...


*. 오늘 글은 2021년 11월 25일 올린 글을, 다시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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