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우씨의 '달내마을' 이야기(29)
며칠 전 아는 이가 우리 집에 들렀다. 읽지 않고 놀고 있는 책을 가져가라고 했더니 냉큼 달려왔다. 그런데 나를 만나자마자, “아니 선생님, 아침부터 삼겹살 구워 드셨습니까?” 하는 게 아닌가.
대뜸 짐작이 갔다. 이런 말을 하도 자주 들었으니 말이다. 10월에 들어서면 내 몸에서 불내가 난다. 마치 삼겹살 구워 먹은 것처럼. 그 까닭은 침대방에서 황토방으로 옮겨 살기 때문이다. 즉 아궁이에 나무를 때야 뜨뜻하게 지낼 수 있다.
그래서 이맘때면 일거리가 생긴다. 땔감을 구해야 하니까. 사는 곳이 산골이라 산에 오르기만 하면 나무가 '천지 빼까리'다. 직장 다닐 때는 돈을 주고 나무를 샀지만 이제는 백수니까 그 돈도 아껴야 한다는 아내의 묵시적(?) 압력에 눌려 몸소 구하려 다녀야 했다.
사실 집 바로 뒤 산에 오르면 땔나무가 많다. 우리 산은 아니지만 나무는 가끔씩 간벌해줘야 오히려 더 잘 자라기에 땔감용 나무가 흔한 편이다. 허나 그러려면 전의 엔진톱이 고쳐 쓸 수 없을 정도로 고장 났으니 일단 톱부터 다시 사야 한다. 새로 사려면 30만 원 이상 드니 난감하던 차 길이 보였다.
날마다 운동 삼아 마을을 한 바퀴 도는 길에 계곡 옆을 지난다. 거기에 제법 쓸 만한 땔감이 눈에 띄었다. 큰비 오거나 태풍 불 때마다 뿌리째 뽑힌 통나무가 아래로 내려오면서 이리 박히고 저리 박히면서 적당한 크기로 다듬어져 있다.
그걸 하루에 두 바퀴의 작은 수레에 담아오면 된다. 한 번 실어오는 양도 이틀분 정도쯤 되니 딱 땀날 정도이고, 날마다 하니 보름만 다니면 한 달치 땔감은 걱정 안 해도 될 터. 나머지는 불 지피는 일만 남았을 뿐.
일주일 전쯤 처음 불을 지폈다. 제대로 온돌이 뜨뜻하려면 24시간 뒤라야 하니 미리 붙여둬야 한다. 불 지피다 보니 나름의 기준이 생겼다. 즉 불 지피는 솜씰 보면 초보인지, 중치인지, 달인인지를 안다는 점.
초보는 불을 지필 때 나는 '소리'에, 중치에 이르면 불 지필 때 나는 '내음'에, 달인은 '불꽃'의 모습에 매료된다.
내가 쓴 글을 뒤적거리니 그게 나타났다. 16년 전 처음 이곳으로 이사와 쓴 글에는 '불 지피는 소리’가 글감이었다. 외손녀가 ‘따닥! 따닥!’ 하는 소리가 난다고 따닥나무라 이름 붙인 대나무, 아궁이가 내려앉을 듯 요란하게 ‘꽝 꽝’ 하는 소리를 내는 꽝꽝나무, 탈 때 ‘짜자작! 짜자작!’ 하는 소리 때문에 이름 붙여진 ‘자작나무’에 관한 내용이었다.
다시 몇 년 뒤의 글을 보니 나무 타는 ‘냄새’를 다루었다. 나무는 타는 소리와 마찬가지로 타면서 내는 내음도 다르다. 낙엽송과 뽕나무와 오리나무, 닥나무 같은 잡목(땔감 기준에서)을 태워보면 각각 나름의 냄새가 난다.
낙엽송은 비록 가을이면 잎이 떨어져 ‘낙엽’이란 접두사가 붙었지만 소나무와 한 가족인지라 송진 내음을 걷어낼 수 없다. 그에 비해 잡목의 내음은 담백하다. 다른 향이 배어들지 않아서리라. 뽕나무는 한 마디로 그윽하게 스며든다. 아주 미묘하면서도 알싸한 내음으로.
그러나 역시 으뜸은 참나무다. 다들 참나무를 최고의 땔감으로 친다. (물론 소나무가 그에 못지않으나 함부로 자를 수 없으니까 제외) 불땀에서 비길 나무가 없으며, 특히 한 번 붙으면 진득하게 오래 타고, 적당히 탄 뒤 불을 끄면 숯이 되니까.
이는 다 아는 상식이지만 오래 불 지펴본 사람만이 아는 묘한 사실이 하나 더 있다. 그건 탈 때 나는 내음이다. 참나무는 참 특이하다. 불이 붙어도 바로 나무 타는 내음이 나오지 않고 다른 내음이 먼저 나온다.
장작을 쟁여놓은 창고는 비를 피하면서 공기도 잘 통하기에 어떤 나무든 석 달만 지나면 바짝 마른다. 그래서 참나무도 삼 년이나 지났으니 당연히 불 붙이면 바로 타리라. 상식 아닌가.
한데 완전히 마른 듯이 보이는 참나무에 불이 붙으면 물이 끓는 듯한 소리가 나며 진짜 물기가 배어 나온다. 이를 수액이라 한다. 바짝 마른 나무라면 탈 때 어떤 물기도 보이지 않아야 한다. 그럼에도 “지지직! 지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수액이 흘러나오니...
참나무 타면서 나오는 수액 내음이 장작 지피는 이로 하여금 불가에 계속 앉아 있도록 만든다. 무슨 내음이라 할까. 어르신들은 소죽 끓일 때의 내음과 같다고 하고, 주부에게 물으면 밥솥에 밥물 끓어 넘칠 때 나는 내음 같다고 하고, 또 어떤 이는 누룽지 내음이라 한다. 다 공통점은 '구수함'이다.
우리는 살아 있을 때의 모습보다 죽어서의 모습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말을 한다. 즉 죽고 나서 부끄러움이 없는 평가를 들어야 한다는 말이리라. 살아 있을 때의 정당한 평가가 죽고 난 다음에 나오니까.
이왕이면 참나무처럼 구수한 내음을 남기면 좀 좋을까. 간혹 늘그막에 무너지는 각 방면의 대가(大家) 들을 보면서 더욱 그렇다. 가끔씩 뉴스에 나오는 그들을 보면서 나도 걱정한다. 내가 잊고 있던 잘못이 들통 나 추한 모습을 보일까 두려우니 말이다. 그리 오래 살지 않았지만 얼마나 많은 헛짓을 했던가.
그래서 글쓴이 가운데 영원히 전해질 구수한 내음을 남기며 돌아가신 두 분이 더욱 생각난다. 11년 전에 입적하신 ‘법정 스님’과 5년 전에 하늘로 가신 ‘신영복 교수님’. 이 두 분과 함께 같은 시대를 살았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하다.
오늘 저녁에도 참나무가 타면서 구수한 내음을 풍길 것이다. 제발 더러운 내음을 풍기면서 죽진 말라는 메시지를 남기면서.
*. 오늘 글은 2021년 11월 23일 올렸는데, 다시 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