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떫은 사람, 단 사람

목우씨의 '달내마을' 이야기(26)

* 떫은 사람, 단 사람 *



날마다 하는 ‘동네 한 바퀴’를 돌다 산길로 접어들었을 때 감이 주렁주렁 맺힌 감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올해 우리 집 감나무는 영 ‘아니올시다’다. 아니 우리 집뿐 아니고 마을 대부분 다 형편없는데 유독 그 감나무만 제대로 달려 있다. 표현을 들이대면 주렁주렁, 주저리주저리, 촘촘, 빽빽하게 열렸다고 할까. 바람이 살포시 불면 넌출지며 춤을 춘다.


우리 집에 키우는 나무 가운데 사실 감나무와 뽕나무에게는 늘 미안한 생각을 버릴 수 없다. 둘 다 100년쯤 되었는데 비료는커녕 거름 한 줌 제대로 준 적 없건만 엄청난 수확물을 안겨주니까.

뽕나무는 평균 300kg의 오디를, 감나무는 수확 적은 해라도 1,000개쯤 선물하기 때문이다. 정말 두 나무를 위하여 해 준 것 하나 없는데도 말 그대로 ‘아낌없이 주는 나무들’이다. 그러니 주인으로서 면목이 안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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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 서리 내린 뒤 따서 깎아야 단맛이 더 들어 더욱 맛있어진다. 우리 마을도 된서리는 아직이나 무서리는 이미 내린 터. 다시 말하면 따서 깎아 널어야 한다는 말인데, 거기 감나무는 주인 없어 (문중 땅에 속한 나무라) 그대로 두었으리라.

손에 잡히는 감을 따보다 ‘아!’ 했다. 단단한 상태여야 하는데 홍시 되기 직전이 아닌가. 마침 양파 심은 텃밭 둘러보러 나온 이장님에게 말씀드렸더니 지금은 다들 바빠 그 감 딸 사람이 없다는 게 아닌가.


어르신들이 짬날 때까지 놔뒀다간 다 홍시 되어 감식초로밖에 쓸 수 없을 것 같아 아쉬운데 그렇다고 내가 딸 수도 없고... 50년 지난 감나무라 상당히 높다. 뿐이랴, 감나무 가지는 보기와 달리 약해서 함부로 올라갔다간 부러져 다치기 십상이다.

한 해 감 따다가 떨어져 중상이나 사망 사고를 당한 농토사니들이 수십 명에 이른다는 '농촌여성신문'의 기사가 아니더라도 감나무에 함부로 올라가선 안 된다. 또 고개 들고 따다 보면 팔이 아프고 목도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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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을 따면 곶감 만들기 위해 깎는 과정이 남는다. 작년의 예로 보면 우리 부부 둘이 하룻밤에 서너 접(한 접에 100개) 깎는다. 깎으면 테라스 위에 매달아 넌다. 그 모습이 꽤 보기 좋다. 특히 사진 찍는 이들에겐 좋은 재료다.


감 깎아 말리다 보면 묘한 진리를 얻는다. 다들 알겠지만 곶감 만드는 감은 단감이 아닌 토종감(또는 ‘참감’)이다. 이 감은 절대로 그냥 못 먹는다. 하도 떫어서. 홍시를 먹다가도 약간 덜 삭은 부분이 조금이라도 들어 있으면 홍시의 단맛을 다 지워버릴 만큼 떫다.

그런데 이 떫은 감이 한 달 보름쯤 지나면 달콤한, 아주 꿀맛 같은 곶감이 된다. 물론 시골에서 감 말린 경험이 있는 이라면 알리라. 과일은 말리면 말릴수록 단맛이 더해진다는 사실을. 말린 사과, 말린 무화과, 말린 포도...


신기했다. 어떻게 말린다고 해서 단맛이 더해질까. 특히 감이. 사과나 포도나 무화과는 떫지 않은 상태로 말리기에 단맛이 듦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가나 그 떫은 감이 어떻게 단맛을 지닌다는 말인가. 그것도 꿀맛 나도록.

떫은 감을 달달한 곶감으로 만드는데 꼭 필요한 요소는 두 가지다. 바람과 햇볕. 바람은 말리는 역할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얼리는 역할도 한다. 곶감 만드는데 '얼음'은 아주 중요하다.

맵찬바람에 감이 얼면 햇볕이 녹이고, 다시 눅진눅진해지면 얼리고... 수차례 반복한다. 이렇게 얼리고 녹이고 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떫은 감에서 달디 단 곶감으로 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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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도 오래 묵혀두면 단맛을 지니는가 보다. 공자는 나이 60을 '이순(耳順)'이라 하여 '남이 나를 욕하는 소리조차 귀에 순하게 받아들여진다.' 했고, 또 70을 '종심(從心)'이라 하여 '어떤 일을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라고 했으니 나이 들면 사람에게서도 단맛이 우러나옴이 분명하다.

헌데 나는 그렇지 못하다. 이상하게도 나이 들수록 욕심이 더 많아지고, 똥고집은 강해지고, 배려심이 더 엷어지는 것 같다. 어떤 땐 아무래도 공자님의 말이 틀렸나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다가도 '아, 나만의 문제겠지...' 하고 체념한다.



그러다가 몇 년 전 늦가을에 비가 심하게 온 적이 생각났다. 그때는 사흘들이 비가 오는 바람에 감이 마르지도 않고 외려 곰팡이가 피는 게 아닌가. 그대로 두었다간 하나도 못 먹겠다 싶어 건조기에 넣고 돌렸다. 밖에 달아놓으면 최소 달보름(45일) 걸렸으나 건조기에선 하룻만에 까들까들한 상태가 됐다.

흐뭇했다. 애써 안 말려도 곶감이 됐으니. 헌데 한 입 베어 물다가 그만 이상하여 도로 뱉었다. 분명 달기는 했으나 예전의 맛이 아니었다. 까닭을 곰곰 생각해 보니 한 가지 과정을 생략했음을 깨달았다. 바로 '어는' 과정을 빼버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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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다 녹았다’를 반복해야 변신하는 건 감뿐이 아니다. 명태가 황태가 되는 과정에도 얼다 녹았다를 반복함으로써 단백질 함유량이 늘어난다. 봄꽃 역시 혹독한 겨울 추위를 이겨내면 낼수록 꽃이 화려하고 싱싱하게 핀다. 이를 춘화처리(또는 춘화 현상)라 하는데, 즉 얼다 녹았다 하는 과정을 견뎌야 한다.

이렇게 보면 내가 아직 단 사람이 못 되고 떫은 사람으로 전전함은 바로 '어는' 과정을 겪지 못했기 때문일까. 그러니 단맛이 배어들지 못했고 '단 사람'이 못 되었다. 식물에게 적용되는 현상이 인간에게도 적용되는가.


이제 서서히 추위가 몰려오고 보름 뒤면 겨울로 접어들 텐데 아직 추위 대비를 하지 않고 있다. 이미 윗녘 산골에선 얼음이 얼고 맵찬바람도 불어와 겨울의 문이 열리고 있다 하니 다가오는 겨울엔 '떫은 사람' 아닌 춘화처리가 제대로 된 '단 사람'이 돼 보고자 한다.


*. 사진은 모두 출처를 밝히지 않아도 되는 pixbay에서 퍼왔습니다.

*. 오늘 글은 2021년 11월 20일 올렸는데, 다시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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