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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준은 때론 흔들려도 된다

목우씨의 달내마을 이야기(34)

* 기준은 때론 흔들려도 된다 *



퇴직한 직후의 백수를 일컫는 말을 ‘화백(화려한 백수)’이라 한다던가. 이제 6년이 지났으니 그 경지에서 벗어나 ‘완백(완전한 백수)’이 되었다. 완백의 조건 가운데 하나가 규칙적인 생활을 함이다. 그때그때 형편에 맞춰 움직인다면 완백이 될 수 없다.
5시 30분 기상하여 배달할 글 점검. 6시부터 산골일기, 6시 10분부터 시 배달. 그런 뒤 마을 한 바퀴 돌기. (요즘은 7시쯤 돈다) 오전 바다로 가 낚시, 오후 텃밭 일과 글쓰기. 일이 생기면 이 일정은 바뀌지만 대체로 이에 따라 움직인다. 저녁 식사 후엔 오후 쓴 글을 다듬고.

규칙적으로 움직이기는 덕이겠지만 시골에 살면 심심하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못 본체 하면 몰라도 둘러보면 다 일할 곳이니까. 그래서 이런 말이 나오지 않았는가. '시골일은 안 하려 들면 할 게 없고, 하려 들면 너무 많다'고.
요즘은 텃밭에 나가도 시간 들일 일이 적어 예전부터 한다 하고선 미뤄놓은 일을 드디어 건드렸다. 얼마 전 '박남준' 시인의 시를 배달하면서 사진 몇 장을 올렸는데 거기 있는 한 장의 사진이 티눈처럼 자꾸 괴롭혔다. 바로 돌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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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박 시인의 집을 방문했을 때 다른 건 하나도 안 부러운데 딱 한 가지 돌탑만은 탐이 났다. 같이 간 다른 이들은 ‘원두막’이 멋있다고 하면서도 돌탑은 ‘그냥 그래요!’ 했는데 내 눈에는 너무 좋았다.

나는 돌탑 대신 돌사람(눈사람 대신)을 만들고 싶었다. 그걸 만들려면 재료비가 많이 드는 것도 아니요,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도 아니요, 전문적인 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받침돌(하체), 중간돌(상체), 갓양태, 갓모자, 이 네 개에 맞는 돌만 있으면 되었다. 처음엔 별게 아니라고 여겼다.


가장 무겁고 단단해야 할 받침돌은 오래전에 굴삭기 기사에게서 이미 얻어 놓았는 데다, 갓 챙 모양의 널찍한 돌(갓양태)도 있고, 맨 위에 얹을 작고 둥근 모양의 돌(갓모자)도 있다. 문제는 상체에 해당하는 중간돌이 없었다.
허나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달내계곡에 가면 얼마나 돌이 많은가. 몇 차례 태풍과 함께 온 폭우로 개울이 완전 뒤집혔을 테니 쓸 만한 돌이 꽤 되리라. 그래서 어렵지 않게 생각했다.
필요조건은 ‘검은색일 것’, ‘사람 머리보다 조금 클 것’, ‘둥글고 단단할 것’, ‘나 혼자 들 수 있는 무게일 것’. 수백만 개나 되는 돌 가운데 이 조건에 들어맞는 돌이 하나는 없으라구. 그렇게 쉽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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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계곡에 내려가자마자 검은 돌만 찾으러 다녔다. 받침돌이 검은빛 도니 그에 맞추려 한 셈이다. 물론 검은 돌이 다른 돌보다 단단하다는 점도 한몫했지만.

한데 한 시간 넘게 돌아다녀도 검은 돌은 있었으나 적당한 크기의 둥글게 생긴 모양이 없었다. 둥근 게 없다는 말은 검은 돌이 주로 계곡 위쪽에 있지 않고 아래쪽에 있다는 뜻이다. 물에 서로 구르며 닳을 시간을 가지지 못했다는 말이니까.


이리저리 왔다 갔다 돌아다녔지만 정말 쓸 만한 검은 돌은 없었다. 그때 문득 꼭 검은색이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래가 검고 위도 검으면 일체감을 줘 좋겠지만, 아래가 검다고 위까지 굳이 검은색이어야 할까.
가운데가 희면 오히려 대비가 돼 더 눈에 잘 띄지 않을까. 그래서 다음으로 정한 색이 약간 누런색 또는 흰색이었다. 다행히 그 두 빛깔의 돌은 둥근 모양이 좀 보였다. 헌데 적당한 크기다 싶으면 한쪽에 모가 나 있고, 둥글다 싶으면 너무 크거나 아니면 너무 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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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크기와 둥근 상태가 좋다 싶어 보면 퍼석돌(손 대면 '퍼석' 하고 잘 부서지는 돌)이어서 딱 맞는 조건을 갖춘 돌은 쉬 눈에 띄지 않았다. 몇 시간을 온 계곡을 훑듯이 돌아다녔지만 마음에 드는 돌은 없었다. 한쪽을 갖추면 다른 쪽이 걸리고...

‘포기해야 하나. 고작 돌 하나 못 찾다니. 저렇게 많은 돌덩이 가운데서 말이야.’ 속으로 화가 났지만 돌들에게 화풀이할 수 없지 않은가. 한 나절의 허비가 아까웠지만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들고 간 공구를 갖다 놓으려 부엌으로 가던 중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에 발을 멈췄다.

그리고 언덕에 둘러친 돌무더기를 보았다. 밭을 갈다가, 혹은 옆 개울을 뒤지다가 괜찮다 싶은 돌들을 한 군데 모아놓은 곳이었다. 뒤적여보니 돌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하얀 빛깔에 적당히 줄무늬가 있고, 조금 단단해 보이고, 적당히 둥근 데다 혼자 들기에도 적당한. 여태껏 바로 곁에 두고 찾으러 다닌 셈이다. 한 나절 계곡을 뒤지다시피 해도 찾지 못한 돌을.
그러고 보니 기준이 처음과 조금 달라졌다. 검은색에서 흰색으로, 완전히 둥근돌에서 적당히 둥근돌로, 아주 단단한 돌에서 대충 단단한 돌로. 이러니 원래 기준보다 조금 떨어지기야 하겠지만 돌사람 만드는 데는 문제없다. 다만 무거우니 도와줄 사람만 있으면 될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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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우연히 초등학교에 근무하는 한 총각 교사를 알게 되어 날더러 ‘형님!’ ‘형님!’ 하며 따르는 사이까지 되었다. 그는 키 크고, 외모도 괜찮고, 직장도 요즘 인기 있는 교사이니 당연히 짝이 있으리라 여겼는데 없다는 거였다. 그래서,

“네 학교에 마음에 드는 처녀 선생님 없어?” 하니,
“이쁜 여선생님은 한 명도 없어요.” 하기에, 다시
“처녀 선생님이 몇 명인데?”
“한 스물댓 명쯤 될 거예요.”
쉬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요즘 아가씨들은 다들 얼마나 이쁜가, 스물댓 명이나 되는데도 한 명 없다니…

그에게도 짝을 고르는 기준이 있을 게다. 보통 여자 배우자의 조건으로 ① 외모 ② 성격 ③ 직업 ④ 집안 등을 거론한다. 그런데 이걸 다 만족시킬 여자가 어디 있는가. 이쁘고, 착하고, 집안 배경 튼실하고, 지식이 풍부한 여인은... 없다. 결코 없다. 마찬가지로 멋지고, 매너 있고, 키 크고, 돈 잘 버는 직업의 사내도 없다. 그는 오직 드라마에만 존재할 뿐.
“이쁜 여선생님은 한 명도 없어요.”란 말에 주목하면 그의 기준에서 ‘① 외모’는 절대적이다. 다른 조건 다 갖춰도 융통성을 보여주지 않을 터이니... ‘스물댓 명 가운데서도 못 찾을 미인이라면 연예인 아니면 미인대회 입상자 아니면 안 되겠네. 아마도 너는 평생 못 찾을 걸.’ 하는 말이 입에서 뱅뱅 거렸지만 그냥 삼켰다.

기준은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고 한다. 이 말은 맞다. 허나 그 기준을 정할 때 제대로 정했는가가 문제가 된다. 즉 너무 이상에만 맞추지 않았느냐는. 그런 기준이라면 흔들려야 한다. 즉 융통성을 보여야 한다. 그렇지 않고 그 기준에 꼭 맞추려 하면 마음에 드는 돌도 없고, 짝도 없다.

*. 제가 찍어 보관했던 박남준 시인 집 기물 사진을 잃어버려, 첫째 돌탑 사진은 <오마이뉴스> (2006.07.01)에서, 둘째 원두막 사진은구글 이미지에서 퍼왔습니다.

*. 오늘 글은 2022년 1월 2일 올렸는데, 다시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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