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7편 : 원성 스님의 '한 켤레의 고무신'
@. 오늘은 원성 스님의 시를 배달합니다.
한 켤레의 고무신
원성
별도 보이지 않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이었습니다.
작은 흐느낌으로
작은 속삭임으로
바라만 보는 한 켤레의 고무신
내 몸뚱이 하나
의지하고 사는 그것에게
되풀이하는 이야기
“그래, 나와 함께 이 길을 가자꾸나.”
- [거울](2001년)
#. 원성 스님(1973년생) : '동자승' 그림으로 유명하며 그림에세이 [풍경] 등 수 편의 베스트셀러 작품집을 냄. 그림은 물론 수필, 시, 소설 등 문학 부문에도 영역을 넓혔으며, 2006년 3년간 영국 유학 마치고 돌아온 뒤 세간의 관심에서 사라짐.
<함께 나누기>
동자승 그림으로 알린 뒤, 수필도 쓰고, 시까지 지으며 다방면에 특출한 재능을 선보여 세간의 이목을 끌었던 원성 스님. 허나 가십거릴 귀신같이 쫓아다니는 기자에게서도 다른 뉴스가 더 나오지 않는 걸로 보아 도를 닦느라 어느 깊은 산사에 완전히 칩거 중인 듯.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갖고 가지 않겠다’ 하며 당신 이름으로 된 책을 출판하지 말아 달라는 유언을 남기신 법정 스님처럼, 그림도, 시도, 다른 여러 장르 작품도 빚이라고 여기셨다면 오늘 스님의 시 다룸이 옳은지 애매하지만 늘 해오던 대로 그냥 제 맘대로 긁적여 봅니다.
오늘 시에 화자가 관찰하는 대상이 명확히 드러납니다. 바로 고무신 한 켤레. 절에 들르면 흔히 스님 머무는 요사채 댓돌 위에 놓인 하얀 고무신. 가끔 산사(山寺)를 배경으로 한 사진전에 가도 볼 수 있습니다. 참 보잘것없지만 어떻게 보면 정겹기도, 또 정갈하기도 하여 한 번 더 눈을 그 사진 앞에 두게 만드는.
“별도 보이지 않는 /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 어둠 속이었습니다”
단순히 보면 해거름이 짙어지면서 산사에 들렀던 참배객도 다 돌아가고 어둠이 조용히 깔리는 시간적 배경을 가리킵니다. ‘별도 보이지 않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은 날이 잔뜩 흐려 별이 보이지 않아 더욱 어둠이 짙어졌다는 뜻도 되겠고, 그만큼 밤이 깊어졌다는 뜻도 되겠지요.
“작은 흐느낌으로 / 작은 속삭임으로 / 바라만 보는 한 켤레의 고무신”
그때 문득 화자의 눈에 댓돌 위에 놓인 고무신 한 켤레가 들어옵니다. 아마도 ‘검정빛’보다 ‘하얀 고무신’이 더 어울릴 듯. 헌데 왜 고무신은 작은 흐느낌으로 작은 속삭임으로 어둠을 지키고 있을까요? 꽤나 궁금합니다.
여기서 고무신은 단순한 신발이 아니라, 내 몸의 무게를 온통 다 버티고 살기에 삶의 동반자 또는 내면의 동반자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고무신이 작은 흐느낌, 작은 속삭임으로 어둠을 지키고 있다는 시구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합니다.
우선 젊은 나이에 속세와 인연을 끊고 승방(僧房)에 든 자기 주인을 생각하니 나오는 작은 아픔으로, 다른 한편으론 도를 얻기 위해 절로 들어왔건만 아직도 도 근처에도 못 가 뒤척이는 주인의 마음을 알아서...
“내 몸뚱이 하나 / 의지하고 사는 그것에게 / 되풀이하는 이야기”
고무신은 스스로 의지를 갖고 행동하지 못합니다. 그저 주인이 가는 대로 따라갑니다. 그러기에 고무신의 삶은 온통 주인에게 매여 있습니다. 허지만 연약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고무신은 자신보다 몇 배나 무거운 주인을 모시고 이리저리 옮겨 다닙니다.
“그래, 나와 함께 이 길을 가자꾸나.”
이제 고무신과 그 신을 신는 사람의 관계는 드러났습니다. 삶의 동반자며 서로가 힘들 때 의지하는 의지처로서. 어쩌면 화자는 고무신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을지 모릅니다. “내가 가는 길이 힘든데 그 길을 함께 가야 하는 네게 무척 미안하구나” 하는.
또한 앞 시행 ‘되풀이하는 이야기’로 보아 그 미안함을 매번 느끼고 있는데 오늘 마침 털어놓을 짬이 생겨 미안함과 고마움을 함께 전하고자 함이 아닌지.
이 시를 지은 원성 스님이 얼마나 맑고 따뜻한 사람인지 엿보게 합니다. 곁에 둔 작은 존재에조차 마음을 주고자 애썼으니. 아마 시를 계속 썼다면 누더기가 된 승복(僧服)에도, 절 마당 한켠에 꽃 피우는 들풀 한 포기나 작은 나무 한 그루에도 연민의 정을 담은 작품을 남겼으련만.
*. 사진은 모두 구글 이미지에서 퍼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