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석 달 전) 달내마을에서 가장 많이 들리는 소리는 예초기 돌아가는 소리다. 이곳저곳 참 요란하다.
벼가 한창 자랄 때니 논둑과 밭둑에 난 풀을 사흘들이 베어내야 한다. 안 그러면 모 자랄 때 영양분을 잡초가 다 빼앗아 먹으니까. 논 한 평 없는 나도 나흘 전에는 잔디를 깎고, 그저께는 언덕 위에 풀을 베고 집 뒤 텃밭 주변의 잡초까지 베느라 바쁘게 움직였으니.
기온이 올라가면 풀만큼 잘 자라는 게 또 있을까. 적당히 비라도 내리면 자라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는 표현이 과장 아니다. 특히 요즘은 짬짬이 비가 와주니까. 아침에 보다가 저녁에 보면 손바닥 길이만큼 더 자란 것 같다. 밭에 심은 채소보다 몇 배나 빨리 자라니 그대로 두면 텃밭이 풀무덤 됨은 뻔한 일.
어제는 보름쯤 뒤 오디가 떨어질 것 같아 그물을 꺼내 손질하느라 바빴는데, 그때 바로 아래서 예초기 돌리는 소리가 나 내려다보니 땅주인이 와서 풀을 벤다. 저쪽 뽕나무는 우리 뽕나무보다 일주일 빠르니 다음 주 중에 그물을 깔아야 한다. 즉 오디 떨어질 자리에 깔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냥 아무렇게나 망사를 깔면 풀 때문에 평평하게 깔 수 없으니 풀부터 제거하러 예초기를 돌리는 모양이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역겨운 내음이 왈칵 코로 밀려든다. 풀내음이다. 아니 풀 비린내다. 얼마 전까진 그리도 향긋할 수 없던 그 내음이었다.
상추나 미나리 같은 남새(채소류)를 베어냈을 때의 그 상큼함이란! 풋풋한 그 내음이 좋아 남새를 뜯거나 베어내면 반드시 코에 먼저 갖다 댔는데... 그런데 어제는 아니었다. 그 향긋한 풀내음에 역겨움을 느꼈으니. 비린내, 그래 비린내였다. 바로 풀 비린내였다.
저쪽에서 일하던 아내가 이상했던지 한 마디 던진다.
“아니 무슨 일 있어요?”
“비린내가 … 풀 비린내가 나서 …”
“어 … 어성초가 거기까지 내려갔나?”
어성초는 말 그대로 물고기 ‘어(魚)’, 비릴 ‘성(腥)’이니까 물고기처럼 비린내가 나는 약초다. 그러니까 풀 비린내란 말과 가장 잘 통하기는 하다. 몇 년 전 어성초가 온갖 질병을 예방한다는 기사에 몇 뿌리 심었는데 그게 온 밭에 퍼졌다가 아래 언덕까지 옮겨진 걸로 생각했나 보다.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풀도 자기의 감정을 표현한다. 식물에 언어가 있다면 풀잎은 냄새로 말하고, 꽃은 빛깔로 말한다. 그러니 풀잎은 후각으로, 꽃은 시각으로 자기네 의사 전달한다.
집에 백리향 천리향 만리향도 있지만 그 냄새가 꼭 같지는 않다. 어떤 날은 좀 진하고, 어떤 날은 좀 연하다. 또 가뭄 때의 내음과 장마 때의 내음이 다르다. 잡초와 나무에 달린 잎이나 꽃에서 나는 내음이 다 다르게 느껴짐은 내 코가 유달리 예민해서가 아니다. 그들도 뭔가를 드러내려 할 때 달리 낸다고 믿는다. 한데 풀에서 비린내가 나다니 …
낚시 좋아하는 이라면 잡은 물고기를 직접 회쳐 먹어본 경험이 있으리라. 손에서 펄떡일 때는 별 냄새가 안 나다가 물고기에 칼을 대는 순간 비린내가 왈칵 난다. 물고기가 지르는 마지막 비명이 거기 배어 있어서다.
낫으로든, 예초기로든 풀이 잘리는 그 순간은 풀도 아픔을 느꼈으리라. 사람 같으면 “아악!” 하며 비명을 질렀겠지만 풀은 냄새로 말할 수밖에 없다. 그 내음이 바로 풀 비린내다. 물고기처럼 마지막 내지르는 비명이 배어 있어서 풀도 그래서 비린내를 뿜어내는 것일까?
가만 생각해 보니 풀 비린내가 아무 때나 나는 건 아니었다. 예초기 돌릴 때 유독 심하게 나는 건 온몸을 난도질했음일까? 분명히 낫으로 벨 때와 내음이 다르다. 낫으로도 풀내음은 나지만 비린내는 아니었다.
처음 달내마을에 와 밭 갈던 때의 일이 생각난다. 호미질을 하던 차 큰 지렁이가 나오기에 징그러워 집게로 집어 저 멀리 던지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본 우리 집 아래 사시는 가음 어른께서 빙긋이 웃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시골에 살려면 가장 먼저 친하게 지내야 하는 놈이 바로 그 녀석이오.” 하시고는,
“좀 더 사시다 보면 밭에서 일하다 내 발에 혹 지렁이 밟힐까 염려하게 될 때 비로소 촌놈이 되는 것이라오.” 하셨다.
어르신은 참 좋은 분이셨다. 말 한마디 해도 어떻게 저렇게 표현할까 할 정도로 감탄할 때가 한두 번 아니었다. 하루는 돌담에 붙은 이끼가 보기 싫어 마구 긁어내자,
“그놈 딴 이름이 돌옷이라오. 입고 있는 옷을 억지로 벗기면 돌이 화내겠지요.”
따지고 보면 남새든 푸새(잡초로 여기는 풀)든 생명 있는 존재가 아닌가. 그런데 우린 동물의 아픔엔 민감하면서도 식물의 비명엔 무관심하다. 예전에 비해 많이 줄었지만 아직도 복날이면 수많은 개들이 도살당한다. 개지옥이란 말을 쓸 만큼 키우는 환경과 도살 장면은 참으로 잔혹하다.
개들이 죽어가는 동영상을 보면서 그들이 내는 비명소리엔 안타까움을 표현하면서도 풀이 잘릴 때 나는 비린내엔 다들 둔감하다. 아니 비린내라고 느끼지 않았다. 하기야 나도 얼마 전까지 그랬잖은가. 그냥 낭만적으로 풀내음이라 썼으니...
그때 돌아가신 가음 어른의 말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정선생, 이제사 촌놈 티가 좀 나는 것 같소. 풀냄새를 제대로 맡을 줄 아니 말이오.”
그러자 풀 비린내가 코로 더욱 왈칵 쏟아져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