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뭄이 몹시 심하게 든 해, 다래가 많이 난다 하여 '다랫골'이라 불리는 한 산골마을에도 가뭄이 계속되었습니다.
짐승도, 나무도, 벌레도, 풀도 가뭄에는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지렁이가 가장 힘들었지요. 아시다시피 지렁이는 습기가 있어야 살 수 있잖아요.
땅 속에서 버티다 버티다 그곳마저 습기가 옅어지자 지렁이들이 밖으로 나왔습니다. 물가라도 찾아가려는 것이었지요.
허나 가는 도중에 그만 땡볕에 타 죽는 일이 생겨났습니다. 겨우 목숨을 건진 지렁이들은 저절로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을 순 없었으니까요.
다들 모이다 보니 이런저런 얘기가 나오면서, 나중에는 신세 한탄의 자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린 살던 곳이 너무 건조해 저쪽 바위 아래로 가려고 가족들 모두 길에 나섰는데, 아이 하나가 늦게 오는 바람에 햇빛에 말라…”
하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쪽에서 꼬마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너희들은 왜 우니?”
“엄마가… 울 엄마가 바깥 사정 알아본다고 나가선 돌아오지 않았어요.”
“저런 쯧쯧…” 하는 혀 차는 소리에 이어,
“얼마 전에는 지나가던 꼬마가 고추를 꺼내 오줌을 싸는데, 하필이면 내 머리 위로 떨어져 얼마나 따갑고 괴롭던지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했지. 그런데 그걸 본 다른 꼬마가 재미있다고 내 몸에다 또 쌌으니 얼마나 아프고 괴로워 몸부림쳤든지…”
“아이구 저런… 못된 놈 같으니… 아무데서나 오줌을 싸다니…”
“내 자식은 또 어떻고…”
“아니 왜? 참 자네 자식이 안 보이네.”
“말도 마, 아 어제 밭으로 가는 사람의 발에 밟혀 그만…”
“저런 쯧쯧쯧…”
“그뿐이라면 얼마나 좋겠어. 내가 사는 음식쓰레기 묻어둔 땅에는 우리 동포가 꽤나 살았는데, 어제는 아저씨 둘이 낚시 미끼로 쓴다고 거기 사는 동포들을 몽땅 다 잡아갔어.”
서로의 얘기를 꺼내면 꺼낼수록 서러움과 분한 마음에 울음소리만 높아갈 뿐입니다.
그때 뒷산 가장 높은 곳에서 안쓰럽게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마을의 수호신이 그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너희들의 처지가 하도 가련하여 내가 소원을 들어주고자 한다. 오늘 해가 지기 전까지 한 가지 소원만 말하도록 해라. 단 해가 질 때까지 내놓지 않거나 두 가지 이상을 내놓으면 절대로 들어주지 않는다는 점을 명심하고.”
이제야 살 길이 생겼다는 생각에 지렁이들은 모두 환호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진지하게 의논을 하였습니다. 먼저 나선 이는 꽃밭 축축한 곳에 사는 지렁입니다.
“사실 사람들이 걸어가다 밟는다든지, 미끼로 우릴 잡아간다든지, 꼬마가 오줌을 눈다든지 하는 건 소원으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내버려 두고…” 하곤 잠시 쉬었다가,
“우리가 가장 피해 입는 건 햇빛에 노출되면 얼마 안 가 죽잖아. 그러니 몸을 가릴 수 있도록 달팽이처럼 집이나 아니면 옷처럼 몸을 가릴 수 있는 게 필요하다고 봐.”
“햇빛을 가릴 수 있는 달팽이도 저번에 말라죽은 걸 보았잖아. 그걸 보면 집이나 옷으로 가리는 건 한계가 있어. 그러니 몸이 마르기 전에 빨리 이동할 수 있도록 다리 몇 개를 만들어 달라고 하자.”
하고 말한 이는 장독과 장독 사이 그늘 진 곳에 사는 지렁이입니다.
“잠깐만…” 하고 말을 자르고 나선 이는 감나무 뿌리 쪽에 살고 있는 지렁입니다.
“다리를 달면 없는 것보다는 빠르기야 하겠지. 하지만 그럴 바에야 다리보다는 더 빨리 이동할 수 있게 날개를 달아 달라고 하는 게 어때?”
지렁이들은 새로운 의견이 나올 때마다 환호를 했습니다. 분명히 현재의 처지를 이겨낼 수 있는 좋은 안건이었으니까요.
이제 한 가지만 택하면 됩니다. 대체로 날개를 달아 달라고 하자는 의견으로 모일 즈음, 집을 둘러매거나 옷을 걸치자는 의견을 낸 꽃밭의 지렁이가 나섰습니다.
“우리에게 날개가 있으면 빨리 갈 수 있어 좋겠다는 생각이 당연히 들겠지만 가만 생각해 봐. 우리들의 몸 자체는 습기가 있는 땅속이 아니면 생활할 수 없어. 그런데 날개가 있으면 땅속에 들어갈 수 없잖아. 빨리 이동할 수 있으면 뭘 해. 땅속에 들어갈 수 없으면 살지도 못하는 걸.”
그 말에 지렁이들은 머리를 끄덕였습니다. 그러자 날개 의견을 낸 지렁이가 발끈했습니다.
“네 녀석이 말한 집을 둘러매자는 의견은 또 어떻고… 햇빛에 노출되는 건 어느 정도 피할 수 있다 해도, 그러잖아도 속도가 느려서 가는 길에 말라죽는데 집을 둘러매면 더욱 느려지니 그럴 바에야 집이 없는 거와 뭐가 달라?”
그때 다리를 달자란 의견을 낸 장독대의 지렁이가 나섰습니다.
“봐라. 옷을 입어도 문제가 있고, 날개를 달아도 문제 있잖아. 그러니 다리를 달아 달라고 하는 게 가장 낫다고 봐.”
허나 이 의견도 참나무 낙엽이 깔린 곳에 사는 지렁이의 반대에 부딪쳤습니다.
“여태껏 우리가 기어 다니다 보니 배가 단련되어 어떤 땅이든, 심지어 자갈밭도, 돌밭도 다 갈 수 있었어. 헌데 다리를 달면 배를 땅에 붙이지 않고 가게 되니 배 근육이 약해질 수밖에. 늘 좋은 길만 가는 게 아니고 돌밭길도, 유리조각이 있는 길도, 경삿길도 가야 하는데, 그러다 조금만 긁혀도 상처가 생길 게고, 그 틈으로 균이 들어가면 큰 병에 걸릴 수밖에 없잖아.”
이 말에 장독대의 지렁이는 입을 다물어야 했습니다.
그러고도 한동안 이게 옳다, 아니 저게 옳다 하며 세 의견을 두고 옳으니 그르니 하는 토론이 이어져, 어느새 시간은 흘러 해가 질 때가 다 되었습니다. 산신령에 소원을 빌려면 해 지기 전에 의견을 합쳐야 합니다. 그러려면 의견을 나누면서 가장 합리적인 의견으로 모아야 합니다.
헌데 토론 과정에서 지렁이들은 의견을 모으기는커녕 어느 한쪽도 양보하려 하지 않아 오히려 세 패로 나뉘었습니다. 해가 질 때가 다 됐어도 저쪽에서 포기하기만 기다릴 뿐 어느 쪽도 자기들의 의견을 양보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과반수 넘는 쪽의 의견을 택하자고 선거를 해봤지만 골고루 1/3씩 나왔을 뿐 과반수를 넘는 쪽은 없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해가 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지렁이들은 산신령이 준 그 좋은 기회를 잃고 말았습니다.
다리 달린 지렁이도, 옷을 입은 지렁이도, 날개 달린 지렁이도 생겨나지 않았습니다. 오직 기어 다니는 지렁이만 다시 남았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지렁이들은 부지런히 기어 다니고 있습니다. 햇빛에 노출된 채 말라죽으며 말입니다.